4. 청와대 대통령 집무실_12월 16일 정오
나이프가 고깃살을 가르며 접시 바닥을 긁고 지나갔다. 붉은 피로 물든 육즙이 흐르는 스테이크 한 점이 포크에 찍혀 그의 입 속으로 들어갔다. 그는 지긋이 눈을 내리깔고 고상하게 고깃조각을 씹어 삼키는 동안에도 양손으로는 스테이크를 깍두기 조각처럼 잘라 접시 위에 일렬 횡대로 정렬시켰다. 엔틱한 분위기의 집무실 집기들이 천년고목의 묵향을 은은히 내뿜으며 엄숙한 실내를 지배하듯 바이얼리니스트 정경화가 연주하는 비탈리의 샤콘느 선율이 집무실의 높은 천정 위를 휘젓고 다니며 환상적인 공명을 투사하고 있었다. 그쯤 되면 레드 와인이 어울릴 법한데도 그는 이따금 목이 메일 때마다 발렌타인 30년 산을 온더록스로 차갑게 들이켰다.
그가 의자에서 일어나 창가의 스몰바를 오가는 사이 40대 후반인 그의 두상은 무광으로 옅게 번들거렸다. 그때 그의 곁에서 양손을 모은 채 공손히 그의 식사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비서실장은 창가로 들어오는 햇살이 그의 식탁 위로 향할까 봐 슬슬 조바심이 났다. 오늘따라 햇살이 유입될 창가의 커튼 위치가 비껴져 있는 걸 본 비서실장이 조용히 움직여 뜨거운 햇살이 대통령의 두상에 앉게 되는 순간만은 간신히 모면했다.
“역시 스테이크는 어린 송아지 등심이 최고야. 오늘 따라 식감이 좋아, 고기가 맛있어.”
“다행입니다. 각하!”
“안 그래도 요 며칠 통 입맛이 없었는데, 결전의 날이라 그런가?”
"여부가 있겠습니까!"
그때 비서실장의 귀에 꽂힌 이어폰으로 밖에서 메시지가 도착했다.
“각하. 밖에 안기부장이 도착했습니다.”
“어서 들라 해!”
비서실장이 그를 데리러 간 사이 대통령은 깍두기 모양의 스테이크 네 조각을 포크에 모두 찍어 단번에 입 속으로 넣고는 야무지게 씹어댔다. 문밖에서 인기척이 들리자 대통령은 온더록스 잔을 입에 털어 넣고 얼음을 씹어가면 가글을 했다. 이윽고 문이 열리자 볼살에 고집을 딴딴하게 매립한 중키의 야무진 몸매를 가진 안기부장이 들어왔다. 그는 각하가 앉아 있는 책상으로 걸어와 구두뒷굽을 부딪쳐 군대식 예의를 차리고 '충성'을 외쳤다.
“각하. 식사 중이셨군요.”
“그래, 내가 오랜만에 느긋하게 밥 좀 먹네.”
대통령은 포크와 나이프를 접시에 내려놓고 웃어 보였다.
“급히 보고드릴 게 있어서 왔습니다.”
안기부장은 두 명의 부하를 좌우로 대동한 채 대통령 앞에 섰다.
“각하! 야권 분열로 김대중은 호남에, 김영삼은 영남에 발이 묶인 상황이라 나쁘진 않습니다. 충청도 역시 김종필 후보가 표밭을 꽉 쥐고 있어 큰 무리는 없어 보입니다만, 문제는 서울입니다.”
안기부장은 부하 직원이 넘겨주는 차트를 보며 발표를 이어갔다.
“우리가 대구 경북 부산에서 기본표를 얻고 서울에선 작전대로 선방해 준다면 큰 문제는 없습니다.”
대통령은 냅킨으로 입술을 닦다 말고 말했다.
“작전대로 선방해 준다면? 이봐 임자! 우리에게 가정법은 없어. 작전은 무조건 성공해야 작전인 거 몰라?”
“각하! 안 그래도 오늘 오전 11시까지 올라온 보고만 종합해 보면, 전국적으로 벌써 절반은 성공한 셈입니다.”
“암, 그래야지!”
대통령은 몸을 일으켜 스몰바로 가서 온더록스 잔에 위스키를 채웠다.
“근데 말입니다. 각하!”
안기부장은 순간 고개를 90도로 숙였다.
“딱 한 군데서 돌발상황이 발생한 거 빼고는.....”
대통령은 평소처럼 머리 위의 땀을 냅킨으로 훔치며 힐끗 안기부장을 처다 보았다.
"돌발?"
“네. 서울의 구로구청 투표소에서 문제가 생겼습니다.”
“뭐라? 대체 무슨 일이야.”
“너무 걱정 마십시오. 충분히 진압 가능합니다.”
담배 불을 붙인 대통령은 안기부장 앞으로 몇 걸음 다가섰다.
“이봐 임자, 오늘 선거에 우리 모두의 목숨이 달린 거 알지?”
“네. 각하! 전군은 진돗개 하나, 경찰은 갑호 비상령을 내린 상탭니다.”
“좋아! 하지만 말이야. 무엇보다 잡음이 없어야 해. 합법적인 정권이양, 저들이 제 손으로 뽑은 대통령이 우리 쪽에서 나와야 한다구.”
“네, 각하. 국민들 스스로 노태우 후보를 새 대통령으로 선출하게 될 것입니다! ”
대통령이 좀 더 가까이 다가서자 안기부장은 구두 뒷굽을 부딪치며 부동자세로 섰다. 대통령은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안기부장에게 술잔을 건넸다.
“그 임무를 끝까지 완수하게! 자, 임자도 고생이 많아. 한 잔 해! 어제 거의 다 오지 않았나!”
안기부장은 꼿꼿하게 선 채로 대통령이 건네는 언더록스 잔을 두 손 모아 받아 안았다.
“민주주의는 말이야, 피를 먹고 자란다지? 근데 이거 더 이상 피를 묻혀서 되겠어? 안 그런가! 내년엔 88올림픽도 열리는 시대에!”
대통령은 책상 위의 신문으로 시선을 내리깔았다. 조간신문 1면의 헤드라인으로 ‘민주주의의 꽃 대통령 직선제, 누가 당선되나.’라는 문구가 보였다.
“각하! 그런데 말입니다.”
안기부장은 대통령에게 다가가 귀엣말을 읊조렸다.
“그거 좋은 생각이군. 새 정부에게도 아주 좋은 선물이 될 거야!”
대통령의 재가가 떨어졌다고 판단한 안기부장은 대통령 집무실에서 나와 밖에 대기하고 있던 관용차에 올라탔다. 검은색 세단의 한 무리가 쏜살같이 휘경동을 향해 질주했다. 그가 지하벙커에 도착하자마자 대공과장과 직원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일제히 자리에서 기립했다. 안기부장은 경례를 받자마자 작전명령을 하달했다.
“대승유통주식회사를 당장 가동해!”
우렁찬 복명복창으로 명령을 수령한 대공과장과 요원들은 일사불란하게 통신실로 향했다. 통신 요원들은 방금 하달받은 작전 정보를 일선의 현장 요원들에게 긴급 타전하기 시작했다. 현장 요원들의 허리춤에 장착된 무선호출기의 액정에는 0011198282라는 숫자가 떴다. 잠시 후 통신 요원들의 책상 위에 놓인 전화기가 마구 울려댔고 해독 가능한 암호 문장이 육성으로 전달되었다. 안기부의 현장 비밀조직인 대승유통의 전 요원에게 하달된 긴급 작전이었다. 대승유통이 가동되면 기존의 현장 조직의 지휘체계는 완전히 달라진다. 오래도록 운동권 조직 내부에 깊숙이 침투해 있던 비밀 요원들과 그들에게 포섭당한 프락치들이 중요해지는 시점이 다가온 것이다. 잠시 후 걸려 온 한 통신 요원의 전화 수화기에서는 대승유통의 현장 요원이 누군가의 이름을 또박또박 호명하는 통화음이 들렸다. 그는 수화기에서 들려오는 정보를 타이핑하기 시작했다.
‘서울지역노동운동연합 이민영, 서울지역총학생회연합 정우신, 인천지역민주노동자연맹 윤상호, 구로동맹파업 주동자 최철민, 재야인사 문정환 …….’
새 작전 명령을 하달한 지 불과 한 시간도 채 되지 않은 시각인데도 서울의 구로구청 안 광장에 모여든 시민들과 운동권 주요 인사들의 면면이 낱낱이 보고 되기 시작했다. 통신 요원들이 분주히 움직이는 사이 안기부장은 벙커 한쪽 벽면에 붙은 4개의 TV 모니터를 응시하고 있었다. 모니터는 이번 대통령선거에 후보를 낸 각 당의 당사 내부를 생생하게 보여주었다. 노태우 후보를 낸 민주정의당 중앙당사에는 전국 각 개표구의 득표수를 기록하기 위한 상황판이 마련되어 있었다. 김대중 후보를 낸 평화민주당과 김영삼 후보를 낸 통일민주당, 그리고 김종필 후보를 낸 공화당의 당사는 사무원들 몇몇이 분주하게 움직이며 전화를 받는 모습이 비치고 있었다. 또 다른 모니터 화면은 치안본부 상황실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때 안기부장의 요청으로 치안본부장과의 직통 전화가 연결되었다.
“나 장부장이오. 이번 기회에 운동권 조직을 싹 다 정리하는 걸로 합시다! 작전은 우리가 단독으로 진행하고 지휘할 테니, 그렇게 아시오!”
안기부장은 늘 치안본부장의 정보 보고를 탐탁지 않게 생각해 왔다. 그는 이번 기회가 어쩌면 국가를 향한 마지막 공적을 세울 찬스가 될지 모른다는 강한 믿음에 사로잡히기 시작했고 수화기 너머로 치안본부장의 절절매는 목소리가 가냘프게 들려오는 가운데 전화를 끊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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