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구로구청_12월 16일 오전 10시
회색빛 새벽이 채 가시지 않은 거리엔 두꺼운 외투를 껴입은 사람들이 분주히 투표소로 향하고 있었다. 서울의 구로구청 현관부터 3층 투표소까지 이어진 행렬이 묵묵히 앞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투표소 입구에는 ‘공정선거감시단’이라는 노란 완장을 찬 이들이 분주히 움직였다. 누군가는 질서를 유지하며 유권자들을 안내했고, 누군가는 명부를 살피며 투표소 안을 점검했다. 사람들 틈에서 얼어붙은 손을 호호 불며 차례를 기다리는 이들의 숨결이 하얗게 흩어졌다.
한편, 구청 정문 쪽, 현관에서 오륙십 미터 떨어진 길가에서는 또 다른 감시단원들이 경비원과 함께 분주히 차량을 통제했다. 차량 한 대가 멈춰 서자 감시단원이 다가가 차창을 두드리고 출입 가능 여부를 확인했다. 대통령 선거일인 오늘, 허가된 차량만이 구청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도로 위 붉은 브레이크등이 희미한 아침 햇살 속에서 반짝였다. 차가운 공기 속에서 사람들의 발소리와 짧은 대화, 종종 들려오는 무전기 소리가 뒤섞이며 선거일 아침이 흘러가고 있었다.
“통과! …… 어이 스토옵!’
정적을 깨며 날카로운 외침이 울려 퍼졌다. 구청 정문을 향해 1톤 트럭 한 대가 느릿하게 다가왔다. 노란 가로등 불빛 아래 트럭의 흰 차체가 흐릿한 윤곽을 드러냈다. 완장을 찬 감시단원이 반사적으로 팔을 뻗어 트럭을 저지했다.
“어떻게 오셨으예? 차에 방문 표시가 읎네예?”
무뚝뚝한 목소리. 트럭 운전사는 느릿하게 고개를 돌려 창문을 내렸다. 그늘진 조명 아래 그의 모습이 드러났다. 깊게 눌러쓴 야구 모자챙 아래로 덥수룩한 수염이 가볍게 흔들렸다. 쉰 목소리가 거칠게 흘러나왔다.
“수고하십니다. 선관위원님들 드실 간식 배달입니다.”
감시단원이 눈을 좁혔다.
“간식예? 무슨 간식인데예?”
운전사는 옆자리의 제빵사 복장을 한 사내를 힐끗 바라봤다. 짧은 침묵이 흘렀다. 그러다 태연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우유랑 빵입니다.”
“그래예?”
감시단원은 서류철을 뒤적였다. 방문 허가 차량 목록을 훑어보며 미간을 좁혔다
“근데, 오늘 출입 차량 목록엔 없는 차다 아입니꺼, 일단 차를 저쪽으로 대이소. 저쪽으로.”
운전사는 조수석의 사내와 눈빛을 교환했다. 미묘한 긴장이 차 안을 스쳤다. 그러나 망설임 없이 차를 감시단원이 가리킨 방향으로 몰았다.
“여기 스토옵! 납품증 있으면 좀 보여 주이소. 선관위에서 주문한 거 맞아예?”
운전사는 고개를 긁적이며 멋쩍게 웃었다.
“저기, 그게 사실은, 선관위가 아니라 구청장님이 직접 자비로 주문하신 겁니다.”
감시단원의 눈썹이 위로 휘어졌다.
“구청장님이예? 그럼 일단 시동부터 끄고 짐칸 덮개 좀 열어 보이소.”
운전사는 말없이 차에서 내려 짐칸 덮개를 걷었다. 차가운 밤공기 속에서 우유 팩과 투명 비닐에 포장된 빵들이 가지런히 쌓여 있었다. 감시단원이 천막을 더 걷어보라고 하려는 찰나, 조수석의 제빵사 복장을 한 사내가 트럭에서 뛰어내렸다.
그는 봉투 두 개를 덥석 집어 감시단원에게 내밀었다.
“특별히 따로 준비해 둔 겁니다. 이거 좀 드시면서 하시죠. 날도 추운데 속이라도 든든해야죠?”
감시단원의 손이 망설임 없이 봉지를 받아 들었다. 순간, 그의 얼굴에 어색한 미소가 스쳤다.
그렇게 트럭은 정문을 통과했다. 감시단원은 봉투를 흔들며 경비실로 향했다. 난로 옆에 모여 있던 경비원들의 얼굴에 일순 환한 미소가 번졌다.
“아따 우리 몫도 제대로 챙겨 오긴 해부렀네 그려? 웬 빵이랑 우유다여?”
“하이고 마, 구청장이 한 번 더 해쳐 묵을라나 봅니데이, 빵이랑 우유를 다 사 보냈다 아입니꺼.”
그때 경비실 구석, 야전침대에 누워 있던 경비원이 벌떡 일어났다.
“뭐라구유? 빵 차는 발써 들어갔는디?”
순간 실내 공기가 얼어붙었다.
“뭐라꼬예?!”
“봉고차였는디? 직접 뒷문 열어 확인까지 했구먼!”
감시단원들의 표정이 급격히 일그러졌다.
“에잇 아이씨도, 이건 구청장이 따로 시킨 거라 안 합니꺼.”
“그래유? 앗따 그려서 우덜 꺼 까지 챙겨줬나유?”
그러나 그들의 대화는 오래 이어지지 못했다.
몇 분 뒤, 구청 건물 3층의 선관위 사무실에서 운전수와 제빵사 복장의 사내는 묵묵히 작업을 진행했다. 철제 상자가 들어 있는 종이 박스를 플라스틱 빵 상자로 위장한 채 직원들의 지시를 기다렸다. 순간, 전화벨이 울렸다. 직원이 짧게 보고했다.
“준비 끝났습니다.”
두 사내는 목례한 뒤 종이 박스를 둘러업었다. 그리고 2층으로 내려가는 계단을 반쯤 내려왔을 때였다.
한 여성 감시단원의 눈이 날카롭게 번뜩였다. 그녀는 계단을 오를 때 들고 갔던 빵 상자가 내려올 때는 커다란 종이 박스로 변한 것을 눈치챘다.
‘이상한데?’
순간, 직감이 번뜩였다. 그녀는 몸을 홱 돌려 소리쳤다.
“저기요! 잠깐만요!!”
두 사내가 멈칫했다. 당황한 운전수가 발을 헛디뎠다. 그리고 박스가 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
순식간에 긴장감이 팽팽해졌다.
운전수와 제빵사 복장의 사내는 머뭇거릴 틈도 없이 박스를 낚아채 계단을 내달렸다. 여성 감시단원은 곧장 호루라기를 힘껏 불었다. 날카로운 소리가 정적을 갈랐다.
“트럭을 잡아!”
혼란 속에서 트럭이 시동을 걸었다. 검은 연기가 기침하듯 토해졌다. 감시단원들이 뛰쳐나왔다. 한 감시단원이 운전석 창문을 덥석 붙잡았다.
“잠깐만요! 박스를 다시 확인하겠습니다!”
그러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트럭이 비호처럼 앞으로 튀어나갔다. 정문을 향해 질주했다.
“정문! 저 트럭 세워!!”
그들은 소리치며 따라갔다. 정문에서는 차량을 통제하던 감시단원 한 명이 돌진해 오는 차량 앞에서 어쩔 줄을 몰랐다. 트럭은 급정거를 했다.
“안 되겠어. 차를 뒤로 빼. 저쪽이야!”
조수석의 사내가 운전사에게 가리킨 곳은 정문 왼편의 화단 쪽이었다. 운전사는 차량을 후진시켰다가 왼쪽으로 틀며 화단을 타고 질주했다. 그러나 화단의 끝은 어른 허리 높이의 붉은 벽돌담이 버티고 있었다.
“부숴! 전속력으로!!”
용달차는 순간 굉음을 내며 붉은 벽돌담을 향해 질주하다 정면으로 충돌했다. 붉은 벽돌이 산산이 부서지며 담벼락이 브이자 모양으로 길을 내었으나 트럭의 양쪽 바퀴가 통과하기엔 터무니없이 좁았다. 용달차의 바퀴가 아스팔트와 마찰해 헛돌면서 고무 타는 냄새가 진동하는 사이 감시단원들은 일제히 차량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이러다 잡히겠어. 차를 버려!”
차에서 탈출한 두 사람은 무너진 담을 넘어 왼쪽 골목길로 뛰기 시작했다. 두 명의 감시단원이 그들을 쫓아 골목길을 향해 뛰어갔다. 다른 감시단원들은 경황이 없는 표정으로 용달차의 짐칸으로 뛰어올랐다.
“대체 이기 뭐꼬?”
감시단원 한 명이 허리춤에 차고 있던 열쇠 꾸러미를 떼어 날카로운 열쇠로 상자를 감고 있던 테이프를 찢었다. 그리고 종이상자를 양손으로 벌려 안에 있는 내용물을 확인했다.
“얼래? 이건 …… 군 부재자 투표함이잖아?”
“투표함이요?!”
그때 마침 골목길로 추격에 나섰던 이들이 숨을 헐떡거리며 돌아왔다.
“인마들 못잡았십니더! 일단 차를 압수하고 선관위 사무실에 가서 투표함 확인부터 해야 안 되겠습니꺼?”
일순간 감시단원 중 한 명이 크게 외쳤다.
“부정선겁니다! 투표함 빼돌리기!”
상황을 직감한 공정선거감시단원들은 누가 시키지 않았어도 각자 역할을 척척 해내기 시작했다. 몇몇은 정문으로 가서 출입구를 바리케이드로 통제했고 건장한 젊은 단원 두 명은 트럭의 짐칸으로 올라가 투표함을 꺼내 놓고 그 위에 등을 맞댄 채 서로 팔을 걸고 투표장을 드나드는 시민들에게 부재자투표함이 불법 반출되는 현장을 덮쳐 증거를 확보했다고 외쳤다.
최초로 호루라기를 불었던 여성 단원은 1층 민원실로 달려가 김대중 후보 측인 평화민주당과 김영삼 후보 측의 민주당사는 물론 기독교방송국에 전화로 이 사실을 알렸다. 그 사이 나머지 단원들은 건물 3층에 있는 선관위 사무실로 몰려갔다.
이미 사태를 직감했는지 3층의 선관위 사무실은 안에서 꼭 잠겨 있었다. 마침 구로구 공정선거감시단장이 도착했다. 감시단장은 직접 철제문을 두드렸다.
“저는 구로구 을 투표소 공정선거감시단장입니다. 선관위원 안에 계세요? 문을 왜 잠근 겁니까! 지금 당장 문을 열지 않으면 강제 개문합니다.”
그래도 안에서는 인기척조차 없었다. 감시단장은 안 되겠다는 듯 뒤를 지키던 다른 감시단원들을 처다 보았다. 문 앞에는 투표를 마친 시민 수십 명이 합세해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다. 한 청년단원이 소화기를 들고 와서 철제문의 손잡이를 직각으로 내려치자 단번에 손잡이가 나무토막처럼 잘려나갔다. 문이 활짝 열리자 분주히 짐을 정리하던 선관위사무실 직원들이 화석처럼 굳은 표정으로 일제히 출입구를 처다 보았다.
“선관위원장님 어디 계십니까!”
직원들은 어쩔 줄 몰라하면서 누구 하나 선뜻 말을 하지 못했다. 그때 마침 방문이 열리더니 선관위원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무슨 일입니까. 여기가 어디라고 강제로 문을 부수고 들어오는 건가요?”
감시단장이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위원장님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십니까? 안에서 문은 왜 잠그신 겁니까?”
“그거야 밖에서 소란이 있는 것 같아 투표함 보호 차원에서 시건장치를 지시한 건데요? 그 정도는 제 권한으로 가능합니다만, 대체 무슨 일인데 이렇게 문까지 부숩니까!”
그 순간 감시단원 중 한 명이 열린 문틈 사이로 뭔가를 목격하고 대화에 끼어들었다.
“동작 그만! 당신들 그거 뭐야. 움직이지 마!”
그는 순식간에 선관위원장이 나왔던 방으로 뛰어들었다.
“여기 왜 투표용지가 있는 거죠?”
방 안의 선관위 직원은 묵묵부답이었다.
“왜 기호 1번만 찍힌 투표용지 다발이 여기 있는 겁니까?”
두 눈으로 그 광경을 목격한 사람들은 일제히 탄식을 쏟아내었다. 감시단장은 직접 두 눈으로 확인해 보았다. 기호 1번이 찍힌 투표용지가 수백 장씩 묶인 다발이 수십 개, 빈 투표용지 천여 장, 손장갑에 뭍은 아직 마르지 않은 빨간 인주의 흔적을 확인한 감시단장은 증거품을 번쩍 들어 보였다.
“이 선거는 무횹니다!!”
현장은 순식간에 분노의 성토장이 되었다. 감시단원들과 시민들은 너나 할 것 없이 행동을 같이 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선관위원들을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방 안으로 몰아넣었다. 누군가 불법 밀반출한 군 부재자 투표함을 부정선거 증거물로 사수해야 한다고 외쳤다.
갑자기 사무실 안에 있는 전화기들은 불에 댄 듯 울어댔다. 책상 위에 놓인 전화기마다 카랑카랑한 벨소리가 울려대자 시민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수화기를 들었다. 그들은 수화기에 대고 자신들이 방금 목격한 일들을 생생하게 전했다. 그들은 전화가 걸려온 곳을 메모해 감시단원들에게 전달했다. 다른 시민들은 일제히 창가로 가서 창문을 활짝 열었다. 누군가가 민방위용 플라스틱 메가폰으로 창밖을 향해 외쳤다.
“여기 부정선거 증거물이 있습니다! 시민 여러분 이 선거는 완전 무횹니다!!”
구로구청 앞마당에는 순식간에 수백 명의 시민들이 모여 트럭을 에워싸고 있었다. 공정선거감시단원 완장을 찬 두 청년이 용달차의 짐칸 위에서 서로 등을 맞댄 채 군 부재자투표함 위에 걸터앉아 양팔을 뒤로 걸고 결연한 눈빛으로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 계속
'소설 > 장편소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연재소설_젊음의 기원_06_출동명령_87년 12월 16일 오후 4시 30분 (1) | 2025.05.21 |
---|---|
연재소설_ 젊음의 기원_05_기자회견_87년 12월 16일 오후 2시 (1) | 2025.04.30 |
연재소설_젊음의 기원_04_청와대 대통령 집무실_87년 12월 16일 정오 (1) | 2025.04.13 |
연재소설_젊음의 기원_03_피맛골_87년 12월 16일 오전 11시 (1) | 2025.04.09 |
연재소설_젊음의 기원_01_J신문사 편집국_87년 12월 16일 오전 6시 (11) | 2025.04.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