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 이후의 기록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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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장편소설 9

연재소설_젊음의 기원_09_실크로드_87년 12월 16일 오후 7시

실크로드 - 12월 16일 오후 7시 집회의 열기가 한창이던 때였다. 임시지휘부 가운데 두 명의 사내가 서쪽 화단의 붉은 벽돌담을 훌쩍 넘어 구청 건물의 뒤편을 돌아 어둠 속으로 슬며시 사라졌다. 학생대표 전용무와 노동자대표 장기운이었다. 두 사람은 비좁은 주택가 골목길을 통해 걷다가 경찰 병력의 후미를 우회했고 거기서 한 블록 정도 더 떨어져 있는 포장마차 거리로 방향을 틀었다. 대학생인 전용무가 앞에서 길을 인도했고 약 10미터쯤 뒤에서 구로지역의 노동운동가로 활동 중인 장기운이 따라 걸었다. 길을 걷는 동안 전용무는 전방과 사위를, 장기운은 뒤에서 미행자를 살폈다. 구청의 담을 넘은 지 약 15분 후 두 사람은 포장마차가 즐비한 구로동의 번화가로 진입하는 데 성공했다.12월 중순의 밤거리는 벌써부..

소설/장편소설 2025.07.03

연재소설_젊음의 기원_08_임시지휘부_87년 12월 16일 오후 6시

임시지휘부 - 12월 16일 오후 6시 12월의 중순의 석양이 서쪽 하늘을 붉게 물들이며 침몰하고 있었다. 광장의 거친 아스팔트 위에서 마지막 입김처럼 머물던 한 줌의 햇볕은 어둠이 날름 삼켜버렸고 차갑고 세찬 겨울바람은 낮게 깔리며 군중들의 발목을 할퀴고 지나갔다. 무채색의 두려움이 닥쳐오고 있다는 것을 무의식으로 감지하면서도 사람들은 끊임없이 광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그들은 저마다 두터운 외투 속에 한 자락의 온기와 한 줌의 기대를 품고 있었지만, 가슴속 어딘가에는 저마다의 분노를 숨긴 채 무뚝뚝한 표정이었다. 남녀노소를 가리 않고 검고 흰 머리채들이 인파를 형성하며 자유롭게 유영하는 광장. 간헐적으로 목청껏 터져 나오는 누군가의 절규나 외침은 수직으로 공명하며 모두의 머리 위에서 잠시 부유하다 어..

소설/장편소설 2025.06.26

연재소설_젊음의 기원_07_인연_87년 12월 16일 오후 5시 30분

7. 인연_12월 16일 오후 5시 30분 시위 진압 현장에 투입된 전투경찰들은 늘 배가 고팠다. 불규칙한 식사 횟수 때문이었다. 물론 시위대와 맞붙어 치열한 전투를 벌이는 시간만 피한다면 어김없이 삼시 세 끼를 챙겨 먹을 수는 있었다. 하지만 그런 날들도 시위 현장에서 먹는 짬밥은 맛이 없고 소화도 잘 되지 않았다. 전경들은 사시사철 길바닥에서 밥을 먹어야 했고 길을 지나는 시민들의 따가운 시선을 감내해야 했다. 바깥의 기온 변화와 불현듯 닥쳐오는 궂은 날씨에도 정권의 안위만을 보위하기 위해 차출된 이 나라의 청년들은 들짐승처럼 묵묵하게 주어진 현실을 버텨가야 하는 처지였다. 군기반장 철만이 속한 백골단 역시 전투경찰들과 다르지 않았다. 일반인 신분의 용병 아저씨들을 뺀 모든 현역 복무자들은 전경이든 ..

소설/장편소설 2025.06.26

연재소설_젊음의 기원_06_출동명령_87년 12월 16일 오후 4시 30분

6. 출동명령_12월 16일 오후 4시 30분치안본부장은 구로경찰서장의 전화를 받으며 뒷목을 꽉 움켜쥐었다. 제13대 대통령 선거 운동 기간 내내 24시 간 근무 체제를 유지하며 불철주야로 쏟아 온 노력들이 이번 사건으로 물거품이 될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예감이 엄습했기 때문이다. 직선제 개헌을 통해 실시되는 대통령 선거인만큼 민주정의당 노태우 후보가 합법적인 외양을 띠고 정권을 창출하게 돕는 게 경찰 수뇌부의 임무였다. 그렇게만 된다면 지난 세월 동안 군사독재 정권의 개로 짖어 온 경찰의 면면을 말끔히 분식할 수 있을 거라고 그는 생각했다. 그래서 선거 당일인 12월 16일은 모든 권력기관에게는 가장 중요한 날이자 역사적인 날인데, 하필 선거 당일에 부재자 투표함 밀반출 사건이 터진 것이다. 치안본부장은..

소설/장편소설 2025.05.21

연재소설_ 젊음의 기원_05_기자회견_87년 12월 16일 오후 2시

5. 구로구청 기자회견_12월 16일 오후 2시 민사독 기자와 신수미 기자는 구로구청 앞마당에 운집한 인파를 헤집고 청사 건물 3층에 있는 선관위원실 앞에 도착했다. 민기자가 문 손잡이를 열고 들어가려 했지만 철문은 안에서 굳게 닫혀 있고 안내문 한장이 달랑 붙어 있을 뿐이었다. 인상을 잔뜩 지뿌린 민기자는 안내문의 글귀를 빠르게 읽어 내려갔다. ‘투표함 반출 관련 내외신 기자회견, 오후 4시’...주최...‘공정선거감시단, 평민당, 민주당, 선관위’민기자는 혀를 끌끌 차며 문을 발로 세게 찼다. 안에서는 전혀 반응이 없었고 인기척도 나지 않았다. 옆에 있던 신수미 기자가 카메라로 안내문과 닫힌 문을 찍었다. 기회견장은 굳게 닫혔으나 다른 기자들은 벌써부터 복도에 앉아 진을 치고 있었고 민기자는 그런 ..

소설/장편소설 2025.04.30

연재소설_젊음의 기원_04_청와대 대통령 집무실_87년 12월 16일 정오

4. 청와대 대통령 집무실_12월 16일 정오 나이프가 고깃살을 가르며 접시 바닥을 긁고 지나갔다. 붉은 피로 물든 육즙이 흐르는 스테이크 한 점이 포크에 찍혀 그의 입 속으로 들어갔다. 그는 지긋이 눈을 내리깔고 고상하게 고깃조각을 씹어 삼키는 동안에도 양손으로는 스테이크를 깍두기 조각처럼 잘라 접시 위에 일렬 횡대로 정렬시켰다. 엔틱한 분위기의 집무실 집기들이 천년고목의 묵향을 은은히 내뿜으며 엄숙한 실내를 지배하듯 바이얼리니스트 정경화가 연주하는 비탈리의 샤콘느 선율이 집무실의 높은 천정 위를 휘젓고 다니며 환상적인 공명을 투사하고 있었다. 그쯤 되면 레드 와인이 어울릴 법한데도 그는 이따금 목이 메일 때마다 발렌타인 30년 산을 온더록스로 차갑게 들이켰다. 그가 의자에서 일어나 창가의 스몰바를 ..

소설/장편소설 2025.04.13

연재소설_젊음의 기원_03_피맛골_87년 12월 16일 오전 11시

3. 피맛골 - 12월 16일 오전 11시 민사독과 신수미 기자는 밤을 샌 날이면 해장술로 하루를 시작하는 버릇이 있었다. 일명 피맛골로 불리는 서울 도심의 광화문 교보문고 뒷골목 노포인 구석집에서 오롯이 단 둘 일 경우가 많았다. 평소 같으면 이른 점심을 해결하는 직장인들로 북새통일 테지만 대통령 선거가 있는 공휴일이라 분위기는 한산했다. 두 사람 모두 조금 전까지 종로사우나에서 단잠을 청했고 땀도 빼고 나온 터라 얼굴에는 광채가 돌았다. 그렇게 그들은 막걸리 두 주전자를 비우고 있었다. 옆구리가 사정없이 패인 낡은 양은 주전자는 쉴틈없이 찌그러진 양재기 잔에 탁주를 탈탈 토해 내기를 반복했다. 선지해장국을 담은 뚝배기가 미지근 해 질 즈음 민기자의 낯빛이 벌겋고 불콰하게 달아 오르자 후배인 신기자..

소설/장편소설 2025.04.09

연재소설_젊음의 기원_02_구로구청_87년 12월 16일 오전 10시

2. 구로구청_12월 16일 오전 10시 회색빛 새벽이 채 가시지 않은 거리엔 두꺼운 외투를 껴입은 사람들이 분주히 투표소로 향하고 있었다. 서울의 구로구청 현관부터 3층 투표소까지 이어진 행렬이 묵묵히 앞으로 이동하고 있었다.투표소 입구에는 ‘공정선거감시단’이라는 노란 완장을 찬 이들이 분주히 움직였다. 누군가는 질서를 유지하며 유권자들을 안내했고, 누군가는 명부를 살피며 투표소 안을 점검했다. 사람들 틈에서 얼어붙은 손을 호호 불며 차례를 기다리는 이들의 숨결이 하얗게 흩어졌다.한편, 구청 정문 쪽, 현관에서 오륙십 미터 떨어진 길가에서는 또 다른 감시단원들이 경비원과 함께 분주히 차량을 통제했다. 차량 한 대가 멈춰 서자 감시단원이 다가가 차창을 두드리고 출입 가능 여부를 확인했다. 대통령 선거일인..

소설/장편소설 2025.04.08

연재소설_젊음의 기원_01_J신문사 편집국_87년 12월 16일 오전 6시

젊음의 기원 1987년 12월 16일 제13대 대통령 선거 투표일 서울의 구로구청에서 벌어진 2박 3일간의 반독재 청춘 누아르! 사회 곳곳에 넓고 깊게 침투한 군부독재의 밀정들과 학생운동 비밀 조직 사이의 숨 막히는 혈투와 비극의 서정! 1. J신문사 편집국_1987년 12월 16일 오전 6시 TV에서 오전 6시 정각을 알리는 시보 소리가 울리자 남자 앵커의 얼굴이 화면 가득 나타났다.“제13대 대통령을 선출하는 국민투표가 지금 막 시작됐습니다. 이번 대통령 선거는 지난 1980년 이후 7년 만에 국민이 직접 대통령을 투표로 선출하는 직선제 선거입니다. 민주정의당 노태우 후보, 평화민주당 김대중 후보, 통일민주당 김영삼 후보, 신민주공화당 김종필 후보 간 4자 격돌이 예상되는 가운데 누가 당선될지는..

소설/장편소설 2025.0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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