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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장편소설

김형수 연재소설_1987’ 젊음의 기원_우리들의 반독재 청춘 느와르_01. 신문사 편집국 87년 12월 16일 오전 6시

형수오빠 2024. 10. 12. 02:46

1987’ 젊음의 기원

우리들의 반독재 청춘 느와르

1987년 12월 16일 제13대 대통령 선거 투표일 

서울의 구로구청에서 벌어진

2박 3일 간의 반독재 청춘 느와르!   

사회 곳곳에 넓고 깊게 침투한 군부독재의 밀정들과 

학생운동 비밀 조직 사이의 숨막히는

혈투와 그 비극의 서정들!

 

1. J신문사 편집국_1987년 12월 16일 오전 6시

 

TV에서 오전 6시 정각을 알리는 시보 소리가 울리자 남자 앵커의 얼굴이 화면 가득 나타났다.

“제13대 대통령을 선출하는 국민투표가 지금 막 시작됐습니다. 이번 대통령 선거는 지난 1980년 이후 7년 만에 국민이 직접 대통령을 투표로 선출하는 직선제 선거입니다. 민주정의당 노태우 후보, 평화민주당 김대중 후보, 통일민주당 김영삼 후보, 신민주공화당 김종필 후보 간 4자 격돌이 예상되는 가운데 누가 당선될지는 내일 아침 8시 경 그 결과의 윤곽이 드러날 예정입니다.”

시장바닥처럼 떠들썩한 J신문사 편집국 사무실은 언제나 희뿌연 담배 연기로 자욱하다. 사회부 팻말 아래 놓인 철제 책상 모서리에는 민사독 기자의 쭉 뻗은 워커발  뒤꿈치가 걸려 있고 그 옆으로는 누런 가래침을 덕지덕지 뭍힌 은하수 담배 꽁초가 수북이 쌓인 크리스탈 재떨이가 금방이라도 바닥으로 떨어질 듯 위태롭게 놓여 있다. 원고지를 앞에 두고 빈칸을 채우지 못한 채 시름하다 달콤한 잠에 빠져든 그를 깨운 건 편집국장의 전화였다.

“국장! 이게 추측 기사로 될 문젭니까?”

굽은 등이 활처럼 휘어지도록 상반신을 뒤로 눕힌 채 전화 수화기에 대고 소리를 버럭버럭 지르고 있는 운동권 출신의 민사독 기자. 진실과 정의를 향한 것이라면 밥줄이고 뭐고 따지지 않고 무소뿔처럼 저돌적으로 직진하는 성깔을 가진 사회부 기자다.

“야, 민사독! 그럼 현장에서 건질 게 뭐라도 있어? 왜 또 그래 인마! 일단 낼 아침 조간 나갈 기사나 올려 빨리!”

수화기 너머에서 편집국장의 타박하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국장! 이렇게 가면 어차피 짜고 치는 고스톱이란 건데? 나도 몰라, 끊어!”

수화기를 내리 꽂은 전화기 옆에는 국장이 던져 놓고 간 원고지가 하얀 이를 드러내고 있었다.  국장은 원고지의 두 번 째 행란에 ‘노태우 대통령 당선 확정’이라는 제목을 적어 놓고 갔고 동이 트자 민사독에게 빨리 원고를 넘기라고 재촉한 것이다. 국장이 써놓은 제목을 보자마자 민사독은 밤새 단 한 글자로 채우지 않았다. 한 번 물면 결코 놓지 않고 가장 강한 독성을 뿜어 내어 제 아무리 덩치 큰 거물이라도 단 번에 제압하는 필력의 소유자 민사독. 그가 오늘 성깔이 잔뜩 난 블랙맘마처럼 독기를 드러내고 있다. 

“누가 대통령이 될 지는 뚜껑을 열어봐야 알 수 있지 않나요?”

밤새 서울의 강남 일대 경찰서를 돌고 이제 막 귀소한 기자 신수미가 말했다.

“놀음판에 운이 따를 것 같아? 타짜들이 낀 판이라구!”

민사독은 필터까지 타들어 간 담배꽁초를 사이다 병에 집어 넣으며 퉁명스럽게 내뱉었다.

신기자는 뒷주머니에서 취재수첩을 꺼내 책상에 툭 던져놓으며 민기자의 오른쪽 와이셔츠 주머니로 손을 가져갔다.

“야이 씨, 넌 담배 좀 사갖고 다녀라! 그리고 이거 펴, 그건 접대용이란 말야!”

민사독의 셔츠 왼쪽 주머니에는 은하수 담배가 오른쪽 주머니에는 새로 나온 88라이트 담배가 들어 있었다. 신기자는 언제나 330원 짜리 은하수보다는 600원 짜리 고급 담배인 88 라이트를 뺏어 피웠다. 이번에도 고참의 질타를 아랑곳하지 않고 신기자는 태연하게 화제를 돌려 깐다.  

“선배! 이렇게 대놓고 판을 짜는데 야당들은 왜 이리 조용하죠?”

민사독의 손에 쥐어져 있던 라이터를 빼앗아 88라이트에 불을 붙이며 그녀가 말했다.

“김대중과 김영삼, 전라도와 경상도가 동서로 갈라졌는데, 투표하기도 전에 둘 다 초상집 분위기 아니겠냐?! 그나마 공정선거감시단이 있으니까 뭔가 사건은 나오긴 하지 않겠냐? 근데, 밤새 경찰에선 좀 건질만한 게 있나?”

신기자가 던져 둔 취재수첩을 들고 펼쳐 넘기며 민사독은 여전히 불평이 가시지 않은 어투로 말했다.

“단순 음주폭행 사건 몇 개뿐이에요.

신기자가 자신의 수첩을 가로채며 말했다. 그때 그녀의 눈에는 민사독의 책상 위에 놓은 원고지가 보였다.  

"선배! 어차피 지금 상태에선 이 예측 기사 못 쓰는 거 아녜요?"

그때 마침 국가안전기획부 언론담당 김계장이 씨익 웃으며 대화에 끼어 들었다. 

“빙고오. 역시 신기자님이 뭘 좀 아시네.”

신기자는 재빨리 민사독을 쳐다봤다. 민사독은 눈짓으로 뒷문을 가리키며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눈치 빠른  김계장이 민사독이 있는 자리로 다가오며 말했다. 

“해장하러 가시게? 그렇다면. 이거!”

김계장은 양복 안주머니에서 한 장의 문서를 내밀었다. 자리에서 일어선 민사독은 양손을 바지 주머니에 넣은 채 삐딱하게 서서 허공을 처다 보았다. 김계장은 당부하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낼 조간에 잘 좀 부탁하네. 선거로 바빴는데, 회식도 좀 하시고?”

순간 하얗고 도톰한 돈봉투 하나가 민사독의 바지 뒷주머니에 꽂혔다.

출입문 쪽으로 나가는 김계장이 놓고 간 한장짜리 문서에는 붉은색 스탬프로 보도지침이란 글자가 선명히 찍혀  있었다. 민사독은 문서를 갈기갈기 찢어 재떨이에 넣고 가래침을 뱉었다. 김계장이 편집국 문 밖으로 나간 걸 확인한 민사독은 안스럽다는 표정으로 혀를 몇 번 차며 뒷주머니의 돈 봉투를 꺼내어 책상 위로 쏟았다. 시퍼런 만 원짜리 수십 장이 투욱하고 쏟아졌다.

“회식비 치곤 좀 쎈데요? 근데 선배! 이건 또 뭐죠?”

민사독은 지폐 사이에 낀 접힌 문서를 집어 펼쳤다.

‘민기자, 또 찢었지? 여기 하나 더 넣어 둠세. - 김계장’

민사독은 미간을 찌푸린 채 그 문서를 한 손아귀로 구겨 쓰레기통에 던졌다.

“야, 이 돈도 다 찢어 버리자!”

“에잇, 선배.”

신기자가 재빨리 책상위의 지폐들을 집어 자기 책상에 앉아 세기 시작했다.

“고기라도 좀 먹어 줘야 힘내서 싸우죠.”

민사독은 얼굴을 찡그리며 의자에 몸을 던진 후 또 담뱃불을 붙였다.

“하여튼 오늘 못 뒤집으면 다 끝장이다!”

그가 내뿜은 담배 연기가 천정에 달려 있는 사회부 팻말을 향해 분사되는 사이 사환으로 보이는 한 고등학생이 사무실로 뛰어 들어와 기자들이 앉아 있는 책상 위로 방금 인쇄와 제본을 마친 조간신문을 돌리기 시작했다. 민사독은 피우던 담배를 입에 문 채로 워커 끈을 풀었다가 다시 조이기 시작했다.

“신기자, 준비 하자!”

훤칠한 키에 검정색 바바리를 걸친 민사독은 책상 모서리에 워커를 걸터 올려놓고 끈을 조이는 버릇이 있었고 그가 워커 끈을 조이면 신기자는 카메라에 새 필름을 갈아 끼웠다. 두 사람은 엘리베이터를 향했다. 광화문이 한 눈에 보이는 신문사 빌딩 22층 창가로 석류빛 태양의 숨결이 넘어 오고 있었다. 복도를 걷는 그들의 뒷모습은 마치 영화 레옹의 남자 주인공과 어린 소녀의 발걸음처럼 흔들거렸다. 

-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