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시지휘부 - 12월 16일 오후 6시
12월의 중순의 석양이 서쪽 하늘을 붉게 물들이며 침몰하고 있었다. 광장의 거친 아스팔트 위에서 마지막 입김처럼 머물던 한 줌의 햇볕은 어둠이 날름 삼켜버렸고 차갑고 세찬 겨울바람은 낮게 깔리며 군중들의 발목을 할퀴고 지나갔다. 무채색의 두려움이 닥쳐오고 있다는 것을 무의식으로 감지하면서도 사람들은 끊임없이 광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들은 저마다 두터운 외투 속에 한 자락의 온기와 한 줌의 기대를 품고 있었지만, 가슴속 어딘가에는 저마다의 분노를 숨긴 채 무뚝뚝한 표정이었다. 남녀노소를 가리 않고 검고 흰 머리채들이 인파를 형성하며 자유롭게 유영하는 광장. 간헐적으로 목청껏 터져 나오는 누군가의 절규나 외침은 수직으로 공명하며 모두의 머리 위에서 잠시 부유하다 어둠 속으로 사라지길 반복했다.
해가 진 광장 곳곳에는 모닥불이 피어 올랐다. 노인과 아이, 학생과 주부, 노동자와 샐러리맨, 동네 주민과 밀려드는 이방인들은 서로 뒤엉킨 채 각각의 면면을 스쳐가면서, 누군가의 열변에 귀를 기울이거나, 삼삼오오 모여 담배를 나누어 피우거나, 그 곁을 기웃거리기도 하면서, 자기들이 서로 다르지 않은 동질한 속내를 꺼낼 준비가 되었음을 눈빛으로 주고받았다. 기실 거기에 모인 모든 사람들은 말로만 들었던 오늘 사건에 관한 진상이 궁금하다는 듯 안색들이 새파랬다.
그들의 자유로운 분위기가 하나의 대오로 정리되기 시작한 것은 임시지휘부가 조직된 후였다. 조직되고 동원된 자들에 의해 광장 한켠에 마이크와 앰프가 설치되자, 대학생으로 보이는 젊은 여성이 마이크를 들고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구호를 외치면서 얼음장 같던 광장의 분위기는 이내 뜨겁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애국 시민 여러분, 다 같이 이쪽을 바라보고 대열을 갖춰주시기 바랍니다.”
여기저기에서 자발적으로 나선 시민과 학생들이 질서 유지를 도왔다.
“제가 서 있는 곳을 중심으로 모여 주십쇼. 제 앞 3미터 앞까지 와서 자리를 잡아 주시면 됩니다. 구청 현관 쪽에 계신 시민 여러분, 이쪽으로 와서 함께 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잠시 후 정식 집회를 열 예정이오니 시민 학생 여러분들은 자발적으로 대열을 맞춰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법정 선거 마감 시간인 오후 6시가 지나자 구로구청 광장을 가득 채운 사람들의 수는 약 5천 명을 육박해갔다. 시민들은 여성 사회자의 선창에 맞춰 “질서, 질서, 질서”라고 외치며 거리를 좁혀갔고 대열이 형성되자 사회자는 맨 앞쪽부터 “앉자, 앉자, 앉자”라는 구호를 선창하며 시민들과 함께 오와 열을 맞추었다. 그들은 신문지나 박스, 책이나 노트, 가방이나 모자 같은 것을 아스팔트 바닥에 깔고 앉기 시작했다. 집회를 위한 대열 정비가 끝나자 여성 사회자는 광장에 모여 앉은 군중을 향해 깍듯하게 인사를 건넸다.
“여러분! 오늘은 제13대 대통령 선거일입니다. 투표 잘 하셨습니까?”
시민들이 우레와 같은 함성을 토하며 “예”라고 답하자 광장은 들썩였다.
“오늘은 우리 국민이 우리의 손으로 직접 대한민국 대통령을 뽑는 역사적인 날입니다. 그런데 오늘 오전 11시 쯤, 저 구청 건물 3층에 있는 선거관리위원회 사무실에서 부재자 투표함이 밀반출되는 것을 시민과 감시단 여러분이 발견했고, 지금 저쪽에서 용달차에 실린 증거물을 시민들이 지키고 있습니다.”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트럭으로 쏠렸다. 인파 속에서 구호와 격정이 터져 나왔다.
“이건 제2의 3.15 부정선거다!”
“군사독재를 연장하기 위해서 우리들의 주권을 도둑질한 겁니다!”
사회자는 계속해서 경과보고를 이어갔다.
“오후 4시에 있었던 내외신 기자회견에서 구로을구 선관위원장은 이 모든 부정선거의 혐의를 부인한 채 회견을 마쳤지만, 그때 기자들과 시민들은 선관위 사무실에서 빈 투표용지와 인주, 장갑, 그리고 붓두껍을 발견하고 선관위원장에게 강력히 항의하였으나 진상규명조차 묵살당해야 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저들이 왜 투표가 마감된 후에 옮겨야 할 부재자 투표함을, 그것도 경찰의 동행 하에 옮겨야 할 부재자 투표함을, 왜 백주대낮에 아무도 몰래 빵 트럭에 숨겨 반출하려 했을까요?!”
시민들은 산발적으로 부정선거라는 단어를 외쳤다.
“네. 맞습니다. 부정 선거 획책 의도가 아니면 설명할 길이 없지 않습니까?”
그때 군중 속에서 한 젊은 남학생이 불쑥 일어나 장중을 향해 돌아서더니 오른손을 높이 치켜올리며 이렇게 외쳤다.
“선거 무효!” 그러자 시민들은 일제히 화답했다. “선거무효, 선거무효, 선거무효……”
시민들의 환호와 함성의 물결은 구청 건물에 부딪쳐 큰 길가 인도와 주택가 골목까지 퍼져갔다. 12월 중순 저녁의 날씨는 급속도로 영하 5도까지 곤두박질쳤지만, 살을 에는 추위에도 시민들의 숫자는 점점 불어났다. 얼음장 같은 아스팔트 위의 맹추위 따위도 그들에게 결코 문제가 되지 않는 분위기였다.
“여러분! 오늘 우리가 여기 모인 이유가 무엇입니까? 부정선거 증거물을 지키기 위해섭니다. 맞습니까? 맞으면 크게 함성!!”
순간 여러 대의 풍물북 소리가 합세했다. 집회가 조직되고 있다는 느낌에 군중들은 환호와 함성을 더하여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좌중을 압도하는 탁월한 도구인 풍물북이 등장하자 분위기는 한층 격동했다. 박수가 터질 때는 풍물북이 함께 두두둥둥 울고, 마이크를 잡은 사회자가 주의를 요할 때는 풍물북이 스타카토로 좌중의 숨을 멎게 했다. 고수의 북소리 장단에 맞추어 집회장에서는 환호와 적막이 번갈아 긴장감을 녹여내었다.
“정식 집회에 앞서 방금 들어온 소식 하나를 전해드리겠습니다.”
순식간에 정적이 감돌았다.
“조금 전 선관위원장이 부재자 투표함 반출이 불법임을 시인했다는 소식입니다!”
그러자 시민들은 다시 환호와 원성을 내뿜기 시작했다.
“선거무효! 선거무효! 선거무효! ……”
사회자는 더욱 앙칼진 소리로 청중들에게 단언했다.
“선관위원장도 불법이라고 시인한 부재자투표함 밀반출은 명백히 부정선거를 고백한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부정선거! 선거무효! 부정선거! 선거무효 ……”
“그리고 또 방금 들어온 소식입니다. 다 같이 주목!”
사회자의 카랑카랑하고 절도 있는 소리에 시민들 모두가 “주목!”을 복창했다.
“오늘 저녁 6시 정각 TV 뉴스를 통해 구로구청 부정선거 소식을 보도하던 기독교방송국에 사복을 입은 기관원들이 들이닥쳐 보도를 강제로 중단시켰다는 소식입니다. 현재 기독교방송국 앞에는 전투경찰 1개 중대가 투입돼 외부인의 출입을 봉쇄한 채, 방송국 안으로 진입해 항의 농성 중인 학생들에게 폭력을 가하며 연행하고 있다는 소식입니다! 시민 여러분 이것이 바로 군사독재 정권의 부정선거 증거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전두환 군사독재 정권은 지금도 폭력으로 국민의 눈과 귀를 가로막고 있습니다.”
흥분한 시민들 사이에서 한 사람이 벌떡 일어나 다 함께 외쳐 보자며 구호를 선창했다.
“공정보도 가로막는 폭력경찰 물러가라!”, “부정선거 자행하는 전두환을 찢어 죽이자!”
시민들은 마치 군대가 한 목소리로 단결된 위용을 드러내듯 일치단결된 목소리로 구호를 외쳤다. 계속되는 사회자의 선구호와 연이은 군중들의 외침들은 검고 차갑게 식어 가는 겨울 밤하늘을 찌르며 하얗게 부서지고 있었다.
“선거무효, 독재타도! …… ”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임시지휘부를 구성해 집회를 진행하던 그 시각, 진압을 맡은 경찰은 구로구청 정문 앞 차도에서 서쪽 방향으로 진지를 구축한 채 지하철 1호선 구로역을 통해 유입되는 시민들을 불심검문하고 있었다. 그런 서쪽과 달리 구로구청 정문에서 동쪽 방면의 도로에는 진압 경찰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영등포와 대림동 쪽에서 구로구청 정문 앞에 정차하는 시내버스를 타고 진입을 하던 시민들은 안전하게 하차해 구청 안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 한편 대통령선거 날에도 쉬지 못하고 출근을 해야 했던 인근 주민들은 퇴근 무렵이 되자 난리 북새통이 되어 버린 동네의 분위기에 놀라 오히려 더욱 구청 앞을 지나치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유입되는 버스마다 승객으로 만원이었고 내리는 인원도 많아졌다. 한편 서쪽 방향에 살면서 동네 지리에 훤한 아이들과 어른들은 경찰의 검문을 피해 구청 건물 뒤편을 돌아 소각장 옆으로 뚫려 있는 이른바 개구멍을 통해 자유롭게 구로구청을 드나들었다.
민사독 기자는 집회가 시작되기 전 구청 건물 1층 현관 경비실에서 있은 임시지휘부 결성 과정을 취재했다. 임시지휘부는 12월 16일 오전부터 있었던 온갖 사태에 함께 대응하며 서로 의기를 투합해 온 자들을 중심으로 구성되었다. 대학생, 노동활동가, 구로구 지역주민, 구로을구 공정선거감시단원, 야당 당원, 재야활동가가 임시지휘부에 이름을 올렸다.
학생 대표는 학생조직의 연락과 동원을 책임지고 집회의 준비와 진행 및 자치규찰대의 조직 운영을 맡았고, 지역주민 대표는 혹시 모를 철야 농성을 대비하여 추위를 피할 종이 박스와 담요, 주먹밥이나 김밥 및 컵라면과 온수를 조달하기로 했으며, 노동활동가 대표는 집회에 필요한 각종 전자장비, 풍물패 동원, 플래카드 제작 등을, 공정선거감시단원들은 억류된 선관위원을 감시하는 팀과 현관 1층 경비실에 마련된 임지지휘부 상황실에서 연락을 담당하는 팀 그리고 집회장과 상황실을 오가는 전령팀을 맡았다. 그리고 이 전체를 조율하고 조력할 간사로 재야활동가인 남녀 각 1명씩이 정해졌다.
임시지휘부는 결성되자마자 신속하게 움직였다. 재야인사들이 참여하는 범규탄 집회를 정식으로 개최하기 위해 시민들을 규합해 사전 집회를 열면서 집회장의 질서를 신속하게 정비해 갔다. 구청 건물의 1층 현관에서는 자치규찰대가 출입자를 통제하기 시작했고, 화장실이 필요한 여성과 외부에서 방문하는 집회의 연사나 기자 또는 임시지휘부로 활동하는 사람들 중심으로 출입을 엄격히 통제했다.
1층 현관 우측에 있는 경비실은 공식 상황실로 쓰기에 아주 적합했다. 거기에서 현관을 드나드는 사람들을 일일이 확인할 수 있었고 각 층별 사무실과 전화로도 통신이 가능했으며, 석유난로가 있어 여럿이 몸을 녹일 수도 있었다. 특히 경비실의 맨 안쪽은 평소 야근 경비원들이 취침을 할 수 있는 별도의 골방도 있었다. 방은 야전침대 2개를 놓을 정도로 좁았으나 바닥에 매트리스를 깔고 그 위에 장판을 얹어 놓아서 대여섯 명 정도는 둘러앉아 회의가 가능했다.
민사독 기자는 임시지휘부의 각자 대표 명단을 기자 수첩에 기록해 두었고 그들이 어떻게 움직이는지를 날카로운 눈으로 관찰하고 감시했다. 그는 명단을 공유한 신수미 기자에게 '각자 대표들의 얼굴을 사진에 담아 둘 것'을 지시했고 신수미 기자는 카메라 가방을 꼼꼼히 챙겨 민첩하게 움직였다. 그녀의 가방에는 이미 준비된 수십 통의 필름과 망원렌즈가 있었고 만일의 사태에 대비한 방독면과 위급시 사용할 수 있는 작은 구급상자가 구비되어 있었다.
신수미 기자는 조심스럽고 민첩하게 임시지휘부의 각자 대표들이 움직이는 동선을 관찰하며 그들의 면면을 카메라에 한 명씩 담아내는 데 성공했다. 그 후로 헬멧과 기자 완장을 두른 채 구로구청을 둘러싼 붉은 벽돌 담장에 걸터앉아 군중들의 모습과 바깥 도로에서 유입되는 시민들을 향해 카메라 셔터를 눌러댔다.
민사독 기자는 상황실에서 TV로 방영되는 저녁 뉴스를 모니터링하기 시작했다. 제13대 대통령선거 중앙선거관리위원회의 긴급 성명이었다. 중선관위는 기자회견을 통해 ‘서울시 구로을구 투표소인 구로구청에서 김대중 후보의 평화민주당 당원들이 합법적인 투표함 이송을 방해하고 부재자 투표함을 탈취하였다.’고 발표했다. 이 소식은 곧바로 임시지휘부의 전령팀에 의해 집회장의 사회자에게로 메모로 전달되었다.
집회장의 시민들은 뉴스 속보를 전해 듣고 격분했다. 허탈한 시민들은 하나 같이 비아냥거리며 웃거나 “선거무효, 독재타도!”라고 외쳤고 그 소리는 구로구 일대를 단번에 집어삼킬 만큼 웅장하게 울려 퍼졌다.
“시민 여러분, 우리 다 함께 ‘님을 위한 행진곡’을 불러 보겠습니다.”
갑자기 신시사이저의 경쾌한 반주와 풍물북의 위용 넘치는 리듬이 시민 모두를 자리에서 기립하게 만들었고 흰색 머리띠를 두르고 집회 연단에 오른 몇몇 사람들의 제스처에 맞춰 군중들은 일사불란하게 오른팔을 사선으로 치켜올렸다.
노래가 끝나자 이번에는 시민들의 자발적인 자유발언 시간이 주어졌다. 어떤 노인은, 어떤 노동자는, 어떤 자영업자는, 어떤 교사는, 어떤 주부는, 어떤 대학생은, 그리고 어떤 여공은, 자유 발언을 통해 ‘끝까지 부정선거 증거물을 우리가 사수하자’고 저마다의 결의에 찬 외침을 토해냈다. 그들은 하나 같이 더 많은 시민들이 몰려오길 바랐고, 부정선거 수혜의 주범이자 전두환 군사독재의 허수아비인 민주정의당의 기호 1번 노태우 후보가 스스로 부정선거임을 자백하고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선거무효를 선언할 때까지 이 집회장에서 한 발짝도 떠나지 않겠다는 결의를 다져갔다.
시민들의 자유발언과 성토 시간은 때론 웃음과 때론 감동 어린 공감을 자아냈고, 5천 명이 넘는 시민들이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나 엄숙하게 애국가를 부르면서, 집회는 애국 시민, 학생, 노동자가 함께 하는 '구로구청 부정선거 규탄 대회'로 공식화되었다.
임시집행부에 의해 주도된 첫날의 집회는 모든 것이 순조롭게 진행되는 것처럼 보였다. 집회란 무릇 목적을 이루기 위한 결사의 행위이므로. 노동자 대표, 학생 대표, 주민 대표 순으로 연사들의 발언이 이어질 때마다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성토의 목소리는 뜨겁게 타올랐다. 시간이 갈수록 집회장 곳곳에서는 어둠을 밝히는 조명들이 하나둘씩 불을 밝혔다. 그 불빛들 아래에서 노동자노래패의 문화공연도 더해져 시민들의 피로감을 덜어주었다. 그리고 시민들 각자의 가슴속에서 꿈틀거리던 두려움도 어느새 증발하는 모습이었다. 어둠과 불빛, 그 사이에서 광장의 공간은 충만해 보였다. 그러나 시간은 정체된 채 한없이 천천히 흘러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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