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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저작권/긍정의 생각(개정판 2014년판)

긍정의 생각 2. 지킬 수 있는 약속만 하겠다는 생각

형수오빠 2024. 9. 24. 02:33

긍정의 생각 02. 지킬 수 있는 약속만 하겠다는 생각

 

약속에 대한 관념

저 사람 양심은 있는 분인가요?’

누가 이런 질문을 해 온다면, 당신은 어떤 기준으로 그 사람이 양심적인지 비양심적인지 평가할 수 있을까요?

금전관계는 깨끗한가?’

술값 계산하기로 해놓고 야박하게 도망간 적은 없었나?’

말로 맹세한 걸 사상누각으로 만든 적은 없었나?’

업무규칙은 잘 지키는 편인가?’

이런 생각들이 스치면서 그가 약속했던 것들이 잘 지켜졌는가 하고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돈을 꾸어 가서 갚을 날을 지나치는 것도, 한 턱 내겠다고 해 놓고 술자리에서 늘 야박하게 꽁무니를 빼는 것도, 다시는 그렇게 하지 않겠다고 맹세해 놓고 시치미를 떼는 것도, 근무규칙을 잘 지키지 않는 것도 모두가 합의된 어떤 약속이행여부와 관련이 있습니다.

우리 대부분은 약속을 잘 지키는 가를 기준으로 그 사람이 양심이 있는가의 여부를 판단하는 습관을 갖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의 양심은 그가 가만히 있을 때는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가 어떤 행동을 하거나 어떤 생각을 말로 표현할 때나 자기에게 다가오는 어떤 불평, 불만, 평가에 대해 어떤 반응이라도 해야 만이, 그의 양심은 다른 사람들의 눈에 드러날 확률을 가집니다. 그래서 양심을 눈으로 확인하는 어떤 뜰채 역할로 약속의 이행 여부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약속은 양심을 지키는 일

약속은 곧 양심을 지키는 일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인도 민중의 아버지 마하트마 간디의 말씀입니다.

인간은 한 평생을 살면서 수많은 약속을 하게 되는데, 그 약속 하나만 잘 지키면서 살아가도 양심 있는 사람으로서 손색이 없습니다.

도가(道家)의 지존인 중국의 사상가 노자의 무위(無爲:억지로 행하지 않음)를 실천하는 삶이기도 합니다. 세상사를 억지로 행하지 않아도 자연의 법칙을 따르게 된다는 인간사의 지존반열에 오를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한편 약속을 잘 지켜서 자기 양심에 용의 여의주와 같은 빛을 발산하게 된다면, 공자가 말한 나이 오십을 일컫는 지천명(知天命)의 경지에도 이를 수 있습니다. 말뜻 그대로 하늘의 뜻을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모든 의미가 양심에 빛이 있는 인간의 영예로운 삶을 얘기하는 것이며, 그 길로 향하는 첩경이 약속을 소중히 여기고 행하는 데 있습니다.

약속의 여러 얼굴들

요즘은 유치원 과정부터 약속을 잘 지켜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교통법규나 공중도덕 같은 공공의 약속은 그걸 배우는 어린아이에게 자연스럽게 양심을 체득하게 해 줍니다.

아이들은 학년이 올라가면서 사적인 약속을 배우며 자랍니다.

친구들과 새끼손가락을 걸면서 하나님에게 맹세를 하기도 합니다.

그렇게 교육을 받은 결과, 아주 사소한 약속이라도 어겼을 때는 자신의 양심불량을 탓하면서 자책도 합니다.

한편 누군가가 약속을 지키지 않은 일로 상처받기도 합니다. 그를 탓하기도 합니다. 친구들에게 알려서 여론 뭇매를 돌려주기도 합니다.

청소년들이 말다툼을 하거나 주먹질을 하는 이유들도 대개는 약속 때문입니다. 약속한 걸 이행하지 않았다! 그리고 배신, 배신자란 말들을 활처럼 날립니다.

길을 지나가는 아이가 힐끗 썩소를 날렸다고 불러서 뭇매를 선사하는 치기 속에도 왜 그냥 지나가지 쳐다보며 배죽거리냐.’는 의미가 숨어 있는데, 실은 자기만의 약속을 상대가 어겼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약속은 양심을 속인 약속, 일방적으로 강요되는 폭력적 규칙일 뿐입니다.

정당한 쌍방협의가 아닌 부당한 일방협의로써 독재자의 근성과 같습니다. 독재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상호수용 원칙에 충실해야 합니다. 민법에서 약속은 쌍방 간에 약속된 내용을 수용한 상황을 일컫습니다. 그렇지 않은 모든 약속은 그 효력을 상실할 수 있습니다.

약속은 공정성의 원칙에도 충실해야 합니다. 그렇지 못할 경우 권력의 힘이나 폭력을 이용해 특권을 누릴 틈이 생기고 그 틈은 점점 벌어져서 법의 순기능 원리조차 파괴하며 다수를 괴롭히고 사회 정의와 양심을 갉아먹습니다..

지키지 못하는 약속들

이렇게 본다면 민주주의의 첫걸음은 약속이기도 합니다. 사적인 개인이나 단체들의 관계에서 이행되지 않는 무수한 약속들 때문에 <민법>은 그렇게 두터워졌다는 사실만 보더라도 그렇습니다.

결국 유치원생부터 대통령에 이르기까지 약속을 가지고 그 양심의 크기와 신선도를 평가받게 된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는 사실이며, 추호도 변질돼서는 안 될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나는 지킬 약속만 합니다.’라고 원칙을 얘기하기도 합니다. 그러면서도 약속된 행위를 정확하게 실천해 내는 일은 쉽지만은 않은 일입니다.

약속을 하기 전에 내가 그 약속을 지킬 수 있는가에 대한 심사숙고의 정신이 얕아서 그럴 수도 있습니다. 꼭 지킬 수 있을 것 같아 덜컥 잡아 놓은 약속도 어떤 의도치 않은 일로 인해 못 지키게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중첩된 약속, 스케줄을 미처 확인하지 못하고 허락해 버린 허약들. 사실 이런 공수표들은 내면의 욕심이 많아서 생기는 것은 아닐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노자는 욕심이 모든 것을 그르친다는 얘기를 합니다. 자연의 순리를 따르지 않고 인위로써 억지로 무언가를 해 내려고 하는 것은 욕심이라고 말합니다.

지킬 약속만 하고자 하는 태도는 일견 배척할 건 아닙니다. 하지만 스스로가 다 지킬 수 있다는 확신이 드는 순간, 욕심을 다스리는 일이 더 중요한다는 생각은 놓쳐서는 안 될 것입니다.

말로 뱉은 구두약속도 계약된 약속

약속은 지키지 않으면 상대방을 불편하게 만듭니다.

말로 하는 약속, 즉 구두약속의 경우 가장 많이 파기됩니다.

내가 언제 그런 말을 했다고 그래?’라는 변명은 술자리에서 심심치 않게 들을 수 있는 말입니다.

내가 그랬어? 정말? 그럼 증거 있어?’라는 말도 비즈니스 관계에서 자주 들려오는 말들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사소한 약속이 아닌 중요한 업무관계의 약속은 문서로 남기거나 계약서를 작성해야 한다고 합니다.

그래야 제3자가 서로의 다툼을 중재해 주기라도 하니까요.

아무튼 약속의 파기, 불이행은 신뢰관계에 금을 긋고, 양심을 저버리는 결과를 초래합니다.

그래서 더욱 우리가 약속에 대한 관점이나 자기 철학을 정립하는 데 있어서 약속의 파기는 양심을 잃어버리는 행위라는 생각을 분명히 해 둘 필요가 있습니다.

약속을 지키는 걸 목숨과 같이 하는 사람들의 철학은 양심을 지키기를 목숨과 같이 한다는 것이니까요.

마하트마 간디 아저씨의 약속

인도의 독립운동가이자 정신적 지도자인 마하트마 간디에게 어느 날 한 낯선 여인이 찾아왔습니다.

그녀의 손에는 어린 아들의 고사리 같은 손이 꼭 쥐어져 있었습니다.

선생님, 제 아들에게 설탕을 너무 많이 먹지 않도록 조언을 좀 해주시겠어요?”

간디는 그 여인의 제안을 받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러지요. 하지만 일주일 뒤에 아이를 다시 데리고 오세요.”

여인은 영문을 모른 채 돌아갔습니다.

정확히 일주일 뒤에 여인은 아이를 데리고 간디를 찾아왔습니다.

근데 선생님, 왜 지난주에 조언해 주시지 않고 일주일 후에 다시 오라고 하신 거죠?”

그러자 간디가 겸연쩍은 미소를 지으면서 답했습니다.

그 때는 저도 설탕을 먹고 있었거든요.”

“..............!”

자신과의 약속을 철저히 지키고자 했던 간디의 일화입니다.

간디는 젊은 나이에 인도해방운동에 투신하면서부터 늘 이런 생각을 갖고 있었습니다.

내가 나와 한 약속은 반드시 지킨다.’

내 양심을 속이는 그 어떤 약속도 해서는 안 된다.’

간디는 남과 한 약속을 자신과 한 약속처럼 생각했고 약속의 이행은 곧 양심의 실천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간디는 자신을 찾아온 여인과 아이에게 자기 양심을 속이면서까지 설탕을 먹지 말라.’는 조언을 해 줄 수 없었습니다. 자신과 약속한 것을 지키기 위해, 자기 양심을 실천하기 위해 간디는 아이에게 조언하는 것을 미뤄야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간디는 첫 방문에서 여인과 아이를 그냥 돌려보냈고 그때부터 일주일 동안 자기도 설탕을 먹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설탕을 먹으면서 아이에게 설탕을 먹지 말라고 하는 것은 스스로 떳떳하지 못한 일임과 동시에 아이를 기만하는 행동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인도를 지배했던 힌두교리와 이슬람교리의 영향을 떠난 한 인간의 양심으로 말입니다.

우리들의 약속 관념

약속에 관한 간디의 생각에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점은 무엇일까요?

자기가 먼저 실천하지 않고서 누군가에게 조언을 하는 건 양심을 해치는 일.’이란 것이 아닐까요?

간디의 이야기를 보면서 우리는 자신을 돌아보게 됩니다.

약속에 대해 우리 각자는 어떻습니까?

약속할 때는 자기 소망에 따라 하면서도, 정작 약속을 행해야 할 때는 게을리하지는 않는지요?

약속은 아주 잘 하면서도 그만큼 약속을 잊어버리기는 더 잘하지 않는지요?

자기도 곧잘 중요한 약속을 파기해 놓고 남들이 한 번 지키지 못한 약속이 있으면 핏대를 세워 공격을 일삼지는 않는지요?

이 모든 것들이 어찌 보면 간디처럼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이 부족하여 생기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프랑스의 계몽주의 철학자 장 자크 루소는 이런 말을 합니다.

약속은 가장 늦게 하는 사람이 가장 잘 지킨다.’

약속을 하기 전에 한 번 더 생각해 보는 태도를 가져서 내가 정말 그 약속을 잘 지킬 수 있을지를 진지하게 가늠해 보는 게 필요합니다.

우리는 이 생각보다 한 발 더 나아가서, 약속은 자기 양심이라는 생각, 즉 약속을 지키는 일은 자기 양심을 실천하는 행위라고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인간의 삶이 아름다운 때는 자기 행동을 되돌아보면서 흔들렸던 양심을 진정시키는 순간이기 때문입니다.

마르틴 부버, 약속은 빚을 갚는 행위

20세기의 위대한 종교 사상가 마르틴 부버(Martin Buber, 1878~1965)는 자신의 저서나와 너(Ich und du, 1923)를 통해 그 동안 서양철학에서 지속적으로 다뤄왔던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철학자 칸트의 물음에 초점을 맞춰 인간이 철학적 사유의 중심에 놓여야 함을 강조한 바 있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나오는 중요 개념 하나가 바로 약속과 관련된 것입니다.

마르틴 부버는 약속을 저 버리는 행위는 죄를 범한다(schuld)’는 의미와 다르지 않다고 말합니다. 죄를 범한다는 의미를 가진 저 개념은 본래 빚지다라는 개념에서 유래했답니다. 따라서 약속을 지키지 못하는 행위는 부버의 관점에서 보면, ‘가 됨과 동시에, ‘을 지는 행위가 됩니다.

한편으로 마르틴 부버는 이렇게 말합니다.

동물과는 달리, 약속이라는 것을 할 수 있는 동물은 인간뿐이다

인간이 약속을 하는 행위란 곧 타인을 향해 어떤 의무의 실현을 약속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 자신을 향하여 인간됨의 실현을 약속하는 것이라고 정의하는 것입니다.

타인에게가 아닌 자기 자신의 인간됨의 실현에 대한 약속!

이 표현에서 우리는 이미 앞에서 살핀 바 있던 간디의 향기를 맡게 됩니다.

즉 간디가 말한 자기 양심을 향한 약속의 이행이라는 의미적 흐름이 다른지 않습니다.

인간은 양심을 실천함으로서 즉 인간됨을 실현하게 되는 것이니까요. 인간됨의 실현은 양심을 실천하는 것인데 그 첩경은 약속한 것을 잘 지키는 일이니까요.

결국 마르틴 부버에게 있어 약속의 이행이 타인을 향한 어떤 의무 실현이 아닌 자신을 향한 인간됨의 실현의 과정이라는 것은 간디에게 있어서는 양심을 향한 약속의 이행인 것입니다.

우리가 타인과 약속을 할 때 충분히 심사숙고할 필요가 있다는 것은 자기 자신에게 심사숙고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동전의 양면처럼 타인과의 신뢰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을 향한 신뢰를 위해 우리는 약속을 소중히 여길 필요가 있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일상, 약속을 위한 약속 패턴

우리의 삶은 수많은 약속의 연속입니다.

매일 아침 하루를 시작하면서 우리는 약속된 업무를 수행하고 약속된 식사자리에 참석하는 등 약속을 중심으로 생활합니다.

자신과의 약속, 부부-애인 간의 약속, 자녀와의 약속, 사업상의 약속, 친구와의 약속 등 하루에도 수없이 성긴 약속의 매듭을 짓고 풀어헤치기 바쁩니다.

그런데 약속 중심의 생활 패턴을 갖다 보면 약속을 위한 약속을 하게 됩니다.

약속은 사람과 사람을 잇는 소통의 실현 형식입니다.

그런데 내용이 돼야 할 사람간의 소통이 주된 목적이 되지 않고 형식 자체가 목적이 될 때가 있지요.

그렇다 보면 양방 간 소통에 무게를 두지 못하고 약속에 의해 우리가 끌려 다니는 현상이 나타나게 됩니다.

그런 역효과 중 하나가 약속이 많은 사람만을 열심히 사는 사람으로 보는 경향입니다. 약속이 없는 사람은 빈둥빈둥 살아가는 나홀로족처럼 생각하기도 합니다.

약속이 많아서 여유롭고 한가한 시간을 보낼 수 없는 사람들에게 세상은 열정적으로 사는 사람이라는 훈장딱지를 발부해 줍니다.

한편 약속 없이 늘 혼자 지내는 사람은 무계획적으로 사는 사람이라고 단정해 버리기 일쑤입니다.

이런 관점에 휩쓸리다 보면 정말로 우리 추구해야 할 삶의 주객이 전도되는 것은 물론이고 진정으로 약속을 통해 추구해야 할 삶의 가치를 상실할 우려가 큽니다.

약속이 어떤 의미의 사건(event)’을 통해서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만들어 주거나 소통을 다각화해 주는 것은 맞지만, 약속이 많고 적음으로 열정적인 사람과 무계획적인 사람을 평가 내리게 되는 것은 약속을 위한 약속에 길들여진 삶의 패턴에 깊이 빠져든 병폐의 자화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약속에 관한 긍정의 생각

일찍이 톨스토이는 남녀 사이의 결혼이 일반적 약속과 마찬가지로 성을 달리하는 두 사람 사이에서만 아이를 갖자는 일종의 약속이라고 했습니다.

사람들은 결혼을 하면 둘 사이에서 아이를 가져야 한다는 책무를 얻게 됩니다.

결혼해 부부가 되어 아이를 낳지 않으면 마치 약속을 어긴 것처럼 사람들의 시선이 곱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이런 경우 사실 부부는 아이를 갖고 싶지 않지만 주변의 의식과 압박으로 인해 아이를 갖게 되는 행동을 불사하기도 합니다.

이런 것이 인간의 삶에 소외감을 주게 되기도 합니다.

결국 약속을 위한 약속들이 인간의 소외를 더욱 부채질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연애 과정에서도 사랑의 소외감은 계속됩니다.

사실 연애는 약속이라는 징검다리를 놓는 것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서로 좋아하는 감정이 싹트고 사랑의 꽃을 틔우는 과정 한 가운데서 함께해야 한다는 약속을 하게 됩니다.

영화도 함께 봐야 하고, 놀이공원도 함께 가야하며, 휴일도 함께 보내야 하고, 휴가계획도 함께 해야 한다는 식의 약속이 암묵적으로 고개를 들게 됩니다.

무수히 많은 약속들이 징검다리처럼 놓이다 보면, 약속하지 않은 일들에 대해서 오해를 사기도 합니다.

그렇게 한 걸음씩 사랑의 강을 건너가는 가운데, 우리는 서로 다투고 싸우고 미워하기도 합니다.

연인들이 헤어지게 되는 직간접의 연유들도 대부분 약속한 것을 지키지 않았다.’ 거나.’거나 ‘약속되지 않은 것을 왜 저지르느냐.’하는 데 있습니다.

진정한 사랑을 추구해야 할 본인의 의지가 왜곡되거나 소외되는 경우들은 세상의 시류에 끌려 다니면서 생겨나기도 합니다.

밸런타인데이,, 백일 기념일, 삼백일 기념일, 오백일 기념일, 천일 기념일, 매년 있는 생일 등 이벤트에 끌려 다니기도 합니다.

남자는 여자를 늘 챙겨줘야 하고 보호해야 하고 감싸줘야 하고 맛있는 걸 사줘야 하는 등속의 약속된 관념들이 불러일으키는 역효과도 발생합니다.

이런 약속을 위한 약속들이 진정한 사랑의 숨통을 틀어막는 경우가 많습니다.

어떤 일을 하더라도 약속을 통하지 않고는 협업, 겸업, 동업조차 불가능합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약속은 신용과 동등한 성격으로 간주됩니다.

비즈니스에서 약속을 어기면 신용을 잃는 결과를 초래합니다. 가장 좋은 약이 마치 가장 쓴 독을 품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앞에서 생각했던 약속의 의미, 즉 양심을 가늠하는 기준이나 사람 간의 소통 형식으로서의 기능을 긍정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럼 우리는 약속에 대해 어떤 관점을 가져야 할까요?

나폴레옹이 말했던 것처럼 약속을 지키는 최선의 방법은 약속을 하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해야 할까요?

앞에서 살펴본 간디와 마르틴 부버의 관점에서처럼, 약속은 자기 자신을 위한 인간됨의 실현이니만큼 지킬 수 있는 것만 약속한다.’는 생각을 가져 보는 것은 어떨까요? 이런 긍정의 생각이 오늘 당신의 삶을 풍요롭게 해 주기를 바랍니다.

약속의 참 의미

성공하는 사람은 책임질 만큼의 약속을 하며

실패하는 사람은 기준이 없이 약속을 남발합니다.

자신의 소망에 따라 약속을 하면서도

지킬 때는 무책임하게 상황에 쫓기는 사람

그래서 약속을 지키지 못하는 것에 대해

죄를 범한다(schuld)’라고 했으며

그것은 곧 빚지다라는 뜻에서 비롯된 것임을

우리가 잊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오늘도 그대는 지킬 약속만 하길 바랍니다.

약속은 양심을 보이는 행위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