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상금
1.
남들 다 쉬는 추석 날 이게 뭐람!
올해로 형사 경력 20년 차인 신동호는 추석 날 아침부터 운동권 수배자 검거에 나서는 자신이 처지가 못내 섭섭했다. 현상금 500만 원에 1계급 특진 포상이 걸린 거물급 수배자 특별 검거령이 본청에서 하달된 지도 벌써 두 달이 지났다. 자기보다 혈기왕성한 젊은 형사들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동분서주하며 용케도 검거 실적을 잘 달성해 갔다. 유독 신형사만은 아직 한 명도 검거하지 못해 연일 속을 끓이고 있다. 이런 사정을 누구보다도 더 잘 알법한 반장은 한 술 더 떠 앞으로는 아침조회 때마다 개인별 검거 실적표를 공개한다면서 엄포까지 놓은 상황이다.
제기랄, 여기가 무슨 보험회사야?
신형사의 푸념은 서울의 신촌 로터리에서 신호를 기다리며 턱이 빠지도록 하품을 할 때까지 이어졌다.
내가 이럴 때가 아니지!
신형사는 어젯밤 이불 속에서 생각했던 자기만의 검거 전략을 되새겼다. 일단 하숙집이나 자취방 같은 은거지에서 생활하는 수배자들은 명절날 집에 혼자 있으면 집주인이나 이웃들에게 의심을 사기 십상이다. 그래서 최소한 명절 당일만큼은 은거지를 벗어나 어디론가 갔다 와야 하는데, 공교롭게도 명절 당일은 거의 모든 식당들이 문을 닫기 때문에 그들은 끼니를 해결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 신형사는 그들의 이런 처지에 주목했다. 엄마가 해주는 따뜻한 밥 한 끼를 그리워 할 그들의 간절함에 베팅을 해 보기로 한 것이다.
마포구 창천동의 산동네로 꼭대기로 향하는 가파른 언덕길을 올라가는 신형사의 뒷모습은 매우 강팔라 보였다. 40대 중반의 나이, 170센티미터의 키에 호리호리한 몸매, 비쩍 말라 위태로워 보이는 두 다리는 누가 보아도 수배자 사냥을 나선 강직한 형사의 모습과는 달라 보였다.
제기랄, 대체 얼마나 더 가야하는 거야?
가파른 언덕이 끝나나 싶었는데 다시 수십 개의 계단이 나타났다.
여기서 멈추면 왕년의 나팔 대장 신동호가 아니지! 이럴 땐 복식호흡 스킬을 써야해!
음대를 다니면서 트럼펫을 전공하다 의무경찰에 지원한 뒤 전공의 특성을 살려 경찰군악대로 차출된 신동호는 제대할 때 운 좋게 특채 선발로 경찰공무원이 되었다. 신형사는 트럼페터처럼 단전으로 호흡하며 수십 개의 계단을 가뿐히 올랐다. 이윽고 눈앞에 펼쳐진 산동네는 리어카 한 대가 간신히 드나들 만큼의 비좁은 골목이 뻗어 있었고 양 옆으로는 허름한 판잣집과 시멘트 벽돌집으로 빼곡했다. 신형사는 골목길을 걸어 올라가며 습관처럼 바지 오른쪽 뒷주머니에 넣어둔 수갑을 만지작거렸다. 그때 저 멀리서 구멍가게 간판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옳거니, 저기서 물어보면 되겠구나!
낡고 오래된 간판에는 하늘슈퍼라고 적혀 있었다. 가게 문을 슬그머니 열고 들어가니 주인으로 보이는 백발의 노파가 앉아 있었다. 신형사는 기회다 싶어 형사수첩을 꺼내 대뜸 노파에게 내밀어 주소를 보여주며 어느 집인지를 물었다. 그런데 백발 노파가 갑자기 가재 눈을 뜬 채로 신형사를 위아래로 훑어보는 것이었다.
그건 왜 물어?
신형사는 당황해서 친척이라고 둘러댔다.
친척이라고?
백발 노파는 혀를 끌끌 차며 처량한 눈빛으로 노려보았다.
근데 왜 빈손이야?
신형사는 어떤 올가미에 걸린 느낌으로 자기도 모르게 사과 한 궤짝 값을 노파에게 지불했다.
저 쪽으로 쭉 올라가, 오른쪽에 있는 보라색 철문이야.
신형사는 사과 한 궤짝을 어깨에 메고 보라색 철문 앞에 도착했다. 칠이 다 벗겨지고 군데군데 벌건 녹이 번져 갈라진 틈새로 마당을 엿볼 수 있었다. 툇마루 밑에 여자 털신 한 켤레가 있었고 다른 집들처럼 식기 부딪치는 소리나 떠드는 소리는 전혀 들리지 않았다. 신형사는 문에서 한 걸음 물러선 채 담배를 피우며 생각했다.
아직 놈은 오지 않았다. 두드릴까? 아니면 하늘슈퍼로 가서 잠복에 들어갈까.
그때 안에서 인기척이 났다.
거기 누구 왔소? 혹시 영민이? 으웨에엑, 으웩 투우!
김영민의 아버지가 분명했다. 근데 그가 툇마루에 주저앉아 피를 토하기 시작했다. 충격적인 장면을 본 신형사는 숨이 멎을 지경이었다. 잠시 후 방 안에서 뛰쳐 나온 아내의 울음소리가 녹슨 철제 대문 밖으로 새어 나왔다. 신형사는 발밑의 사과 궤짝을 한없이 바라보며 서 있었다. 저쪽에서 그를 바라보던 백발의 노파가 다시 하늘슈퍼 안으로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 * *
그 시각 이태원의 해밀턴 호텔 앞 삼거리 주변은 외국인들로 분주했다. 호텔과 삼거리가 한 눈에 보이는 2층 카페의 창가에 앉아 이국적 풍경에 젖어 있던 영민은 소울이 섞인 랩 음악이 나오자 빠른 비트의 리듬에 맞춰 머리를 끄덕거렸고 이내 혼잣말을 읊조리기 시작했다.
여긴 정말 한국의 명절과는 무관해 보여, 여긴 다른 세계야, 대한민국 경찰들 날 잡아보라지, 나 태어난 곳은 대한민국이지만 내 정신적 조국은 프랑스거든, 날 체포해 볼 테면 해봐, 내가 오늘 부모님 집에 갈 줄 알아? 바보 같은 착각, 모든 지인과 연락을 끊고, 어쩌다 만남도 절대금지, 애인도 떠나 보냈는데, 날 잡으러 명절에 집으로? 설마 그런 바보 같은 형사가 있을까! 있을 순 있겠지, 아냐 정말 있지, 외로움의 덫에 걸려 명절날 집에 갔다 잡혀간 나의 친구들, 그리움의 덫에 걸려 애인을 만나다 잡혀 간 나의 선배들, 하지만 나도 그런 바보 같은 우를 범할 거라고 생각하는 형사가 있다면, 정말 웃긴 짬뽕인 거야!
영민은 래퍼처럼 자유롭게 혼잣말을 읊조리는 습관이 있었고 뿐만 아니라 홀로 먹고 홀로 마시고 홀로 시간을 보내고 홀로 대화하는 법에 익숙하다. 이태원은 그런 영민에게 언제나 최적의 장소였다. 명절에도 문을 닫는 식당이 없었고 밤낮으로 불심검문을 당할 일도 없었다.
신형사의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다. 역시 놈은 달랐다. 산동네 둔덕에 솟아 있는 판잣집들의 지붕을 덮고 있는 검은색 기름종이들이 어느덧 석양빛에 물들어 반들거리는 시간까지도 영민은 출몰하지 않았다. 점심도 거른 채 하루 종일 골목 어귀에서 잠복한 신형사는 밀려드는 허기에 작전상 후퇴를 결심했다. 명절 당일의 오전과 오후라는 빈틈을 놈이 어떻게 극복하고 있을지 신형사는 무척 궁금했다. 이럴 줄 알았다면 집에서 편안하게 차례 음식이나 먹으며 두 발 뻗고 낮잠이나 채워 둘 걸 하는 후회가 밀려왔다.
2.
전 날 밤 늦게까지 술을 마신 신형사는 아침 10시를 넘겨 경찰서 정문으로 터덜터덜 걸어 들어왔다. 어차피 반장에게 좋은 소릴 듣긴 틀려 먹었고 아침부터 마누라에게 잔소리를 잔뜩 들은 터라 심기는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다. 문득 김영민의 집 앞에 놓고 온 사과 한 궤짝이 떠올랐고 하늘슈퍼의 백발 노파가 어젯밤 꿈속에서 한 말이 생각났다.
꼭 사과 먹으러 와!
갑자기 서늘한 기운이 스쳤고 하늘에는 먹구름이 해를 가리고 있었다. 형사계 사무실은 늘 담배 연기로 자욱한 아수라장 같았다. 밤사이 잡혀 온 수배자들을 앉혀 놓고 윽박지르며 취조하는 형사들의 고성과 욕지거리, 신경질적으로 내려치는 수동 타자기 소리로 어수선했다.
신형사, 나 좀 봐!
갑자기 반장의 목소리가 신형사의 뒷전을 때렸다. 예상했다는 듯 신형사는 곧장 회의실로 들어갔다.
어떻게 된 거야?
김영민이 집에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아니, 그게 말이나 돼? 벌써 몇 번째 허탕이야! 오형사는 저 새끼 아버지 산소까지 쫓아가서 잡아 왔다구.
신형사는 할 말이 없었다.
무조건 이번 달 말까지 그 자식 잡아들여! 무슨 수를 써서라도 김영민이 잡아오지 않으면 그 땐 자네도 각오해. 알았어?
신형사는 검거 전략을 다시 짜야겠다고 생각했다. 책상 서랍을 뒤져 김영민의 파일이 담긴 봉투를 꺼내 들고 밖으로 나오니 가을비가 추젓추젓 내리고 있었다. 갑자기 숙취에 오한이 겹쳐왔다. 갑자기 쩔쩔 끓는 순댓국 생각이 났고 단골집으로 가서 펄펄 끓는 국물을 홀홀 불어가며 속을 달래고 보았다. 그는 봉투에서 김영민의 얼굴이 찍힌 여러 장의 사진을 꺼내들었다. 학생과 시민이 운집한 종각역 사거리 한 복판에서 봉고차 위에 올라가 구호를 외치는 모습, 학교 정문 앞에서 쇠파이프를 든 채 화염병 시위를 주도하는 모습, 학과 MT에서 다 함께 찍은 단체 사진 속의 얼굴이었다. 김영민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연고지에 나타나거나 연고자와 접촉을 시도한 적이 없었다. 외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도 충청도 골짜기의 마을로 잠복을 나갔지만 놈은 나타나지 않았다. 신형사의 전략과 예상은 하나 같이 모두 빗나갔다. 잡으려고 달려들면 결코 잡히지 않을 놈이었다. 신형사는 갑자기 김영민을 향한 질투심이 일었다.
3.
학생운동 수배자와 그를 지원하는 비밀조직 간의 접선은 특급 보안이 요구되는 작전이다. 3개월에 한 번씩 정해진 약속 장소에 도착해 1차로 접선 장소를 확인한 후 보다 안전한 2차 접선 장소에서 대면하는 식이었다. 드디어 그날이 왔다.
영민은 아침 일찍부터 은거지의 방 내부를 꼼꼼히 정리하고 치웠다. 만에 하나 접선 과정에서 검거되더라도 경찰이 은거지에서 발견할 만한 조직활동의 증거는 아무것도 없어야 한다. 검거되지 않더라도 혹여 은거지로 돌아올 수 없는 어떤 사태가 발생한다면 이곳에 남겨진 모든 물건과 짐들은 포기해야 한다. 이를 대비해 영민은 일주일 전부터 진짜 중요한 기밀 문건들과 메모지를 모두 소각했고 꼭 필요한 물건들은 몇 정거장 떨어진 지하철역의 사물함에 넣어 두었다.
말쑥한 정장 차림으로 변신한 영민은 누가 봐도 반듯한 직장인이었다. 그는 집을 나서자마자 익숙한 골목길을 거쳐 몇 블록을 걸어갔고 거기서 시내로 가는 버스를 탔다. 버스 맨 뒷좌석에 앉은 영민은 손목시계로 후미를 비춰 미행 차량이 있는지 감시했다. 버스가 종로구 관철동의 종로서적 앞에서 정차했을 때는 승객 중 맨 마지막으로 내렸다. 내린 자리에서 길 건너편 정류장을 살폈고 경찰의 불심검문이 없는 걸 확인한 뒤 지하상가를 통해 YMCA 건물 앞으로 가서 다른 버스를 기다렸다. 승객 중 맨 나중에 올라탄 영민은 버스가 아현역을 거쳐 이대입구역을 지났을 때 아무도 하차벨을 누르지 않은 정류장에서 내린 뒤, 길을 건너 다시 버스를 타고 아현역으로 돌아가서 내렸다. 그리고 영민은 이쯤에서 교통편을 변경했다.
지하철로 내려간 영민은 시청 방향 전동차의 맨 끝 칸에 탈 것처럼 서 있다가 반대편에서 당산행 전동차가 들어와 승객들이 내린 뒤 문이 닫히려 할 때 재빨리 맨 앞칸으로 뛰어 올랐다. 전동차 안에서는 경로석 옆에 선 채로 벽에 등을 기대어 책을 보는 척하며 객차 내 승객들의 동태를 살폈다. 전동차가 홍대입구로 진입하자 영민은 창문을 통해 플랫폼 근처를 살피며 불심검문을 하는 경찰은 없는지 확인했고 전동차가 정차해 문이 열리면 문이 닫히기 직전까지 뜸을 들였다가 닫히기 직전에 스윽 빠져 나왔다. 영민은 안도의 한 숨을 쉬며 전동차의 꼬리 쪽 플랫폼까지 천천히 걸어가서는 교통편으로 이동하는 과정에서 미행의 꼬리를 완전히 차단했다고 판단되었을 때 유유히 역을 빠져 나갔다.
서교사거리에서 홍대정문으로 향하는 도로 왼편의 홍익아파트 상가 1층 커피숍 가르텐. 영민은 가르텐이 한 눈에 보이는 길 건너편 2층 커피숍의 창가에 앉아 시계를 보았다. 1시 55분. 예상대로 홍대정문 쪽에서 접선자가 걸어내려 오고 있었다. 그는 가르텐을 지나쳐 오십 미터 거리에 있는 국민은행 홍대지점으로 들어갔다가 정확히 1분 후에 다시 나왔고 가르텐으로 다시 걸어왔다. 그가 은행을 들어 갔다가 나오는 사이 그를 미행하는 자는 없었다. 영민은 가르텐을 오가는 사람들을 5분 정도 더 주시하다가 커피숍 창가의 구석에 있는 공중전화 박스로 들어가 가르텐을 내려다보며 전화를 걸었다.
손님 중에 이동은씨 부탁합니다.
잠시 후 그가 전화를 받았다. 영민은 곧바로 2차 미션을 던졌다.
지금 나와서 홍대정문으로 가세요. 정문을 등지고 왼쪽 샛길로 보이는 복사집 골목으로 내려가면 주택가로 이어지는 좁은 골목길이 나옵니다. 기독교방송국 담장을 따라 계속 걸어가세요. 뒤돌아 보면 안 됩니다.
영민은 그가 이동하는 모습을 먼발치에서 지켜보며 미행자가 없는지 살폈다. 그가 홍대 정문을 등지고 복사집이 있는 샛길로 걸음의 방향을 틀 때, 영민은 호미화방 앞을 지나 첫번째 왼쪽 골목으로 들어갔고 백 미터 전방의 좁은 골목을 빠져 나와 주택가 골목으로 진입하는 그의 옆 모습을 지켜봤다. 영민은 그를 따르는 미행자가 없는 것을 확인하고 빠른 걸음으로 그와의 거리를 좁혀갔다. 그가 기독교방송국 담장을 지날 즈음 뒤에서 따라가던 영민은 그를 추월하며 한마디를 던졌다.
저를 따라 오세요. 베티 블루.
영민은 먼저 가 자리를 잡고 앉아 문을 열고 들어오는 그를 맞았다. 손에 들린 검은색 캐시미어 코트, 170센티미터 정도의 키, 늘씬한 몸매가 드러나는 붉은색 원피스, 생기 넘치는 긴 생머리, 그가 환하게 미소를 지었다. 마치 오랜만에 만난 연인처럼 그는 영민의 옆 자리에 앉았다. 그의 쭉 뻗은 다리가 창가로 스민 햇살에 빛났고 플레져 향수는 옅고 은은하게 퍼졌다.
건강은 어떠세요?
음, 괜찮아요.
여종업원이 다가와 물 잔을 내려놓자 그가 커피를 주문하며 팔짱을 끼어왔다.
언제 뜬데요?
영민이 묻자 그녀는 영민의 귓불로 입술을 가져가 속삭였다.
3일 후요.
이번엔 완벽해야 합니다?
알고 있어요.
그리고 이거 전달 부탁합니다.
영민은 책 한 권을 내밀었다.
쿤데라 소설이네요?
겉싸개와 책표지 사이에 플로피 디스켓이 있어요.
잘 전달할게요. 그리고 여기 새로운 주민등록증과 현금카드요. 지금껏 쓰시던 건 소각하래요. 그 사람은 곧 군에 입대한대요. 이건 작년에 전역해 이번에 복학한 예비역 거라 안전하답니다. 안에 대학원증까지 만들어 놨어요.
두 사람은 부드럽게 속삭이며 간결하게 접선을 마쳤다. 내려오는 계단참에서 두 사람은 악수로 작별을 했고 마지막 계단을 먼저 밟은 영민이 왼쪽 골목길로 사라지자 그는 오던 길로 사라졌다.
4.
밤새 야근 당직을 서고 사우나 수면실에서 잠을 청하던 신형사가 화들짝 놀라 눈을 떴다. 팬티 속에 넣어 둔 무선 호출기의 진동 때문이었다. 삐삐 액정에 적힌 숫자는 11911901. 끝자리 01은 반장을 뜻하고 119는 긴급 상황을 의미했다. 신형사는 쏜살같이 뛰쳐나가 반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형사? 지금 뭐하고 있어. 김영민이 나타났데!
어딥니까?
대학로 학림다방이야.
확실합니까?
우리 협조자들이 한 둘이야? 자네한테만 주는 정보야! 어서 튀어!
신형사는 곧장 차를 몰고 대학로로 달렸다. 시계를 보니 오후 12시 35분이었다. 시내의 교통 흐름은 원활했다. 신형사는 운전대를 잡았던 오른손의 주먹을 불끈 쥐었다. 김영민을 보자마자 어떻게 체포할까, 무조건 선빵을 날리고 나서 수갑을 채울까, 신형사는 이렇게 가슴이 뛰는 게 참 오랜만이었다.
승용차가 종로 5가로 접어들 즈음 삐삐 소리가 울려댔다. 82828201. 반장이(01) 빨리빨리(8282) 서두르라는 메시지였다. 신형사는 종로5가 전철역 사거리를 목전에 두고 잠시 신호대기로 정차했다. 원거리에서 이정표를 보니 대학로 방향으로는 좌회전이 금지되어 있었다. 신호가 바뀌어 사거리에 다다르자 신형사는 과감히 신호를 무시한 채 이화사거리 방향으로 좌회전을 했다.
이제 넌 독안에 든 쥐나 다름없다. 김영민!
대학로 거리는 불길한 기운이 감돌았다. 어디서 몰려왔는지 학생들이 마로니에 공원과 방송대학교 캠퍼스는 물론 거리 곳곳에서 삼삼오오 모여 들고 있었다. 학림다방의 2층 창가에 앉아 있던 영민은 시계를 보았다. 12시 55분이었다. 창밖의 보이는 대학로 거리는 극도의 긴장감과 함께 정적이 감돌았다. 시계 바늘이 정각 1시를 가리키는 순간 한 청년이 도로 한복판으로 뛰어 들었다.
흰색 와이셔츠 차림에 붉은 머리띠를 한 청년은 오른 팔을 치켜들고 광주학살 공범 노태우 정권 타도하자는 구호를 외쳤다. 구호가 터지자 순식간에 4차선 도로는 학생들로 넘쳐났다. 학생들은 양쪽 차선을 점거한 채 정방형의 대열을 형성하면서 혜화동로터리 방향으로 행진했다. 화염병을 든 수십 명의 남학생들이 대열의 가장자리를 에워싸고 사수대형을 펼치자 인도에서는 장사를 하는 상인들이 저마다 셔터를 내리기 시작했다. 학림다방 안에 있던 손님들은 밖에서 일어난 광경을 보기 위해 창가로 몰려들었다.
대학로로 진입하는 이화사거리에서 신호에 걸려 대기하던 신형사의 승용차는 불과 600미터를 남겨두고 발이 묶여 버렸다. 답답해진 신형사는 외마디 탄성을 질렀다.
아! 이런 염병할.
다급해진 신형사는 신호를 무시하고 차를 몰아 진입을 시도했으나 교통경찰이 이미 통제선을 구축한 터라 쉽지 않았다. 신형사는 교통경찰에게 경찰신분증을 제시하며 사정을 설명했다. 하지만 채 5분도 되지 않아 대학로 쪽에서 나오는 차량들과 이미 대학로 쪽으로 진입했다가 시위 대열에 길이 막혀 유턴해 오는 차량들이 뒤엉키기 시작했다. 교통경찰들도 어쩔 도리가 없는 상황이 신형사의 눈앞에서 벌어지자 그는 다급히 갓길로 차를 몰아 세워 놓고 인도로 뛰기 시작했다. 인도의 구경꾼들을 헤치고 전력질주를 하는 동안 신형사의 귓가에는 학생들의 외침이 화살처럼 날아와 하나씩 꽂히기 시작했다. 숨을 헐떡이며 전력투구로 달려 온 신형사가 드디어 학림다방 앞에 멈춰 섰다. 신형사는 습관처럼 뒷주머니에 손을 대어 수갑을 확인했다. 그리고 천천히 학림다방의 목조계단을 하나씩 오르며 숨을 골랐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창가 쪽에서 웅성거리는 사람들이 보였다. 그때 오른 쪽 구석에서 등을 보인 채 창가를 응시하는 한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 신형사는 수갑이 있는 바지 오른쪽 뒷주머니로 손을 슬그머니 집어넣으며 조심스럽게 창가로 다가갔다.
김영민!
신형사는 번개처럼 한 쪽 손목을 낚아 채 철커덕 수갑을 채우는 데 성공했다.
당신 누구야! 누군데 수갑을 채우는 데!!
얼굴을 돌린 그는 신형사가 아는 김영민이 아니었다. 신형사는 날카로운 시선으로 시위를 구경하는 창가의 사람들과 다방 내 복층의 테이블에 앉은 사람들을 훑어 보았다. 어디에도 김영민의 얼굴은 없었다. 수갑을 다시 풀어주고 정중히 사과를 한 뒤 돌아선 신형사는 계단에 털썩 주저앉아았다. 계단 밑 출입구가 지옥의 입구처럼 캄캄해 보였다.
시위대는 혜화동사거리에서 무장한 전투경찰과 백골단에 맞서 격렬한 싸움을 벌였다. 아스팔트 위로 화염이 끌어 올랐고 연이어 페퍼포그 차량이 거대한 굉음과 함께 불꽃을 터뜨리며 젊음의 거리 대학로를 매캐한 연기로 덮어 갔다. 신형사는 눈물과 콧물이 범벅이 된 채로 최루탄 연기가 자욱한 길을 휘청거리며 뚫고 지나갔다. 한 참을 가니 레카차 한 대가 자신의 승용차를 끌고 어디론가 출발하는 모습이 보였다.
5.
이번 가두시위 주동자가 바로 김영민이야!
반장은 잔뜩 화가 나서 신형사의 면전에서 펄펄 뛰며 나무랐다. 신형사는 입이 두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어제 시위로 김영민의 현상금이 천만 원까지 뛰었어!! 본청에서 전담반 꾸려지면 넌 숟가락도 못 얹어, 알기나 해? 잡든지 말든지 이젠 니 맘대로 해!
회의실 문을 박차고 나가는 반장의 뒷모습을 보며 신형사는 오기가 발동했다. 영민의 몸값이 두 배가 되었다는 말을 듣는 순간 눈을 번쩍 뜨며 이렇게 포기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그래, 마지막이 될 지언정 비장의 카드라도 한 번 써 봐야하지 않겠나!!.
신형사는 김영민의 신상정보 파일을 다시 꼼꼼히 읽어 내려갔다. 누런 갱지에 깨알 같이 적혀 있는 김영민의 출생기록, 학력, 지인관계 정보들을 훑어보다가 빨간색 볼펜으로 밑줄을 긋고 별 표시를 해 둔 부분에서 신형사는 시선을 멈추었다. 그는 형사수첩을 꺼내 몇 가지 정보를 옮겨 적고 지도책을 펼쳤다. 서울시 서초구 방배동 31번지 방배시장 내 상가 104호.
추석 명절 대목이 지났어도 방배시장 안의 다인떡집은 여전히 찾는 손님이 많았다. 여섯 평 남짓한 공간에서 20년 째 떡집을 운영해 온 50대 부부는 밀려드는 주문 납기를 맞추느라 정신이 없었다. 참기름의 윤기가 자르르한 절편과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백설기가 박스에 포장되어 배달을 기다리고 있었다. 방금 떡 배달을 마치고 돌아온 오토바이 헬멧러는 시동을 끌 새도 없이 다시 떡상자를 싣고 배달지를 향해 출발했다.
오후 2시가 되자 다인떡집의 주인 내외는 물청소를 하며 장사를 마무리 하기 시작했다. 때마침 배달을 끝낸 오토바이가 도착하자 신형사는 그를 향해 다가갔다. 헬멧을 벗자 그의 검은 단발머리가 찰랑거리며 흔들렸다. 신형사를 단번에 알아 본 그는 놀랍지도 않다는 듯 턱으로 방배다방 간판을 가리켰다.
가게로 찾아오지 말랬죠! 영민이랑 끝난지가 언젠데요.
다인은 불쾌한 심기를 드러냈다. 신형사는 그의 퉁명스러운 타박을 아랑곳하지 않고 영민의 사진이 박힌 수배전단을 내밀었다.
현상금이 두 배로 뛰었어, 무려 천만 원이야.
칫,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인데요?
다인이 다리를 꼬며 말했다.
근데 그건 알아? 영민 아버지가 폐병으로 투병중인 거?
다인의 눈빛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신형사는 이 순간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다인아, 영민이 자수시키자.
뭐라구요? 자수라고 했나요? 죄를 지은 게 있어야 자수도 성립하는 거 아닌가요? 게다가 현상금이 천만 원으로 뛰었는데, 자수라뇨. 자수하면 없는 죄를 진짜 없애 주기라도 하나보죠?
다인은 신형사를 향해 빈정거렸다. 그때 마침 다인의 바지주머니에서 띠리리리 삐삐 소리가 울렸다. 다인의 작은 손바닥 안에 쏙 감춰진 빨간색 삐삐의 액정에 찍힌 숫자가 무엇일지 신형사는 궁금해 미칠 지경이었다.
급한 호출이에요, 이제 가 봐야 해서 그럼 전 이만.
잠깐만!
신형사가 다인의 손목을 덥석 잡았다.
그럼 숫자만 확인할게.
다인이 손을 뿌리치고 일어서려 하자 신형사가 다인의 손목을 낚아챘다.
이런 씨발 새끼가!
다인은 탁자에 있던 뜨거운 커피 잔을 신형사의 얼굴에 뿌려 버렸다. 신형사가 반사적으로 몸을 비틀며 다인의 손목도 함께 꺾였다. 다인의 비명이 또 터졌다. 그 순간 다방 안의 손님들은 일제히 신형사를 째려봤고 카운터에 앉아 있던 여사장이 큰 소리로 '지금 뭐 하는 거야!'라고 소리치자, 신형사는 슬그머니 다인의 손목을 놓았다. 다인은 신형사의 정강이를 신발코로 걷어 차고 다방을 나갔고 신형사는 절룩거리며 그 자리에 주저 앉았다.
승용차로 돌아 온 신형사는 불쾌한 기분을 쉽게 가라앉히지 못하고 있었다.
제기랄, 이젠 감청도 맘대로 못하는 형국이 됐는데 연고자조차 만나지 않는 수배자 새끼를 어떻게 잡으란 거야! 인력보강이라도 해줘야 몇 날 며칠 잠복이라도 하며 뻗치기라도 해 보지. 수사비도 꼴랑 쥐꼬리 만큼 주면서 말야.
신형사는 은근히 열패감에 휩싸여 갔다.
김영민 이 새끼는 지가 독립군인 줄 아나봐, 여자 친구랑 헤어지면서까지 이 땅의 정의와 민주주의를 위해 청춘을 불사르다니, 그것도 수배자 신분으로.
갑자기 뿔따구가 치민 신형사는 영민의 사진을 박박 찢어 차창 밖으로 내던졌다. 그때였다. 시장 입구 슈퍼마켓 옆 공중전화 박스 앞으로 다인이 슬그머니 나타났다. 운전석에 앉아 있던 신형사는 본능적으로 자세를 낮추었다. 다인은 수화기를 든 채 주변을 살피더니 삐삐를 보면서 전화 버튼을 눌렀다. 잠시 후 통화를 마친 다인은 시장 안으로 사라졌다.
신형사는 차에서 내려 잰걸음으로 공중전화 박스로 뛰어갔다. 그는 재빨리 동전을 넣고 재다이얼 기능이 있는 우물 정 자 버튼을 꾸욱 눌렀다. 신호음이 울렸다. 딸각.
네. 레드애플입니다.
혹시 방금 전화 받았던 남자 손님과 다시 통화할 수 있을까요?
아, 그 분이요?
네, 젊은 남학생요.
그 분 방금 전에 나가셨는데요?
아, 그럼 거기 혹시 어디죠?
레드애플 건대입구점입니다.
신형사는 다인을 만나러 온 자신의 선택이 옳았다는 판단이 들자 공중전화 부스 안에서 헛주먹질을 한 차례 해대며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그는 좀 더 차분하게 차 안에서 생각을 정리해 보았다. 우선 김영민의 은거지는 건대입구 근처일 확률이 높다. 그리고 김영민은 방금 전 다인에게 아버지가 폐병에 걸린 사실을 들었을 가능성이 있으니 수배자의 금기를 깨고 아버지를 만나러 산동네로 잠입할 가능성도 생겼다. 문제는 잠복인데, 건대입구에서 잠복을 할 것인가, 집 근처에서 잠복을 할 것인가!
신형사는 영민의 부모가 사는 창천동으로 차를 몰았다. 불현 듯 레드애플의 의미가 새겨졌다. 빨간 사과! 순간 하늘슈퍼의 백발 노파가 꿈에 한 말이 또 떠올랐다. 사과 먹으러 와! 빨간 사과와 레드애플. 갑자기 신형사의 몸에 소름이 돋았다.
6.
다인과 통화를 한 후 영민은 심란해졌다. 신형사가 찾아와서 전했다는 말이 사실이라면 확인이 필요했다. 영민은 은거지에서 세 정거장 떨어진 공중전화 부스로 갔다. 그리고 전화 다이얼을 돌렸다.
할머니 영민이에요!
어이쿠 우리 새끼네?
어릴 적 젖을 물려가며 돌봐준 하늘슈퍼의 백발 노파는 영민을 손자처럼 반겼다. 영민은 대뜸 아버지의 근황을 물었다. 할머니의 대답은 단호했다.
우리 새끼는 아무 걱정 말고 독립운동이나 잘 하셔, 얼마 전에도 일본순사 놈 하나가 왔다 갔쪄, 그러니까 우리 새끼는.
그 순간 누군가 할머니의 수화기를 낚아챘다.
영민이니?
할머니의 손녀딸인 동갑네기 소꿉친구 하늘이의 목소리였다. 하늘이는 영민에게 모든 게 사실이라고 말해 주었다.
16인치 모니터의 하얀 커서가 영민의 눈동자에서 껌벅거리고 있었다. 영민은 이제 이곳을 떠나, 아니 이 세계를 떠나, 잠시 다른 세계를 다녀와야 한다고 생각한다. 아버님을 오래도록 뵙지는 못할 것이라는 것을 마음에 새긴다. 50평생 가족의 생계를 잇기 위해 전념해 왔던 아버지이다. 남들은 자연히 향유할 수 있었던 온갖 태생적 배경과 조건으로부터 끊임없이 배척되고 배제되어 배움의 기회조차 잃어버린 한 인생이 이제 더 이상 자신의 몸조차 가눌 수 없어서 붉은 선혈을 토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자 이내 영민의 눈시울은 뜨겁게 젖어갔다.
아버지의 가난과 고통을 보상해 줄 사람은 누구란 말인가. 영민은 자기 밖에는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여전히 자신은 더 많은 가난한 자들과 고통 받는 자를 위한 삶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일말의 희망이 가슴 속에서 녹아내리듯 마음이 쓰리다. 내가 하고 있는 학생운동이 아버지와 같이 소외된 자들에게 어떤 기회와 용기를 북돋아 줄 수 있을까. 생각하면 할수록 영민의 가슴은 더 먹먹해져만 간다. 갑자기 피로가 몰려오고 영민은 방바닥에 쪼그려 앉아 무릎 사이로 고개를 묻는다. 눈앞에 떠오르는 검은 형상들이 자꾸 영민을 괴롭힌다.
신형사는 이틀째 잠복 중이었다. 운전석에서 깜빡 잠이 들었다가 깼더니 심한 갈증과 노곤함이 밀려왔다. 차에서 내려 하늘을 보니 밤하늘에 그믐달이 떠 있었고 무심코 올려다 본 계단 끝에는 하얀 머리칼이 은빛으로 빛나는 백발 노파가 서 있었다.
사과 먹으러 왔구나!
저 위에서 노파가 소리쳤다. 신형사는 노파의 손에 이끌려 하늘슈퍼로 갔다.
이리 앉아라. 똑바로. 옳지.
노파는 아랫목을 내주었고 빨간 사과를 깎기 시작했다. 한 입 베어 물 때마다 시원하고 단 과즙이 입안 전체를 뻐근하게 적셨다.
할머니 정말 맛있는 사괍니다.
그래? 니 놈이 사과 맛을 좀 아는 구나. 근데 사람 마음은 왜 그리도 모르냐?
백발 노파는 다 벗긴 사과를 한 손에 들고 칼로 한 조각씩 잘라 신형사의 입에 넣어 주며 말했다.
할머니, 무슨 말씀이세요?
신형사가 묻자 백발 노파는 갑자기 정색을 하며 받아쳤다.
너 얼마 전에 사과 한 궤짝 사갔지?
신형사는 입에 사과를 문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궤짝에 수북히 담긴 쌀겨 속으로 손 넣어 봤니?
신형사는 고개를 절레절레 했다.
쌀겨 속에는 말이다, 니가 처 묵나 갸가 처 묵나 다 같은 사과가 묻혀 있어.
할머니, 갸라니요?
영민애비 말이다 이 놈아! 이런 쌀겨만도 못한 놈을 봤나!
그 순간 백발 노파의 두 눈이 새빨간 핏빛으로 번뜩이기 시작했다. 신형사는 둔기에 얻어맞은 듯 눈앞이 혼미해져 의식을 잃어 갔다. 강렬한 꿈이었다. 신형사의 눈꺼풀이 열리자 붉은 경광등이 번쩍거렸다. 고개를 들어 차창 밖을 보니 앰뷸런스 한 대가 시동을 켠 채 서 있었다. 신형사는 화들짝 놀라 몸을 일으켰다. 차 밖으로 나가 보니 계단 저 위쪽에서 한 소방관이 누군가를 엎고 내려오는 중이었다. 부축하는 소방관의 뒤를 따라 내려오던 한 여인의 흐느낌이 귓전을 파고 들었다.
여보, 여보, 영민 아버지!
앰뷸런스가 떠나고 신형사는 한 참을 그 자리에서 멍하니 서 있었다.
7.
신형사는 영민 아버지가 입원한 병원을 찾았다. 영민은 며칠이 지나도 나타나지 않고 있었다. 병문안 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홀로 남편의 병상을 지키는 영민의 어머니를 남몰래 지켜보는 일도 이젠 서서히 지쳐갔다. 신형사의 인내심은 극에 달해 있었다.
신형사는 지하 매점에서 오렌지주스 한 박스를 사서 영민 어머니가 화장실을 간 사이 병실로 들어갔다. 영민 아버지가 숨만 쉬는 나무가죽처럼 느껴졌다. 몇 초간 눈을 감고 목례를 한 후 그의 곁에 음료수 박스를 놓고 병실을 나섰다.
잠시 후 상기된 표정을 한 영민 어머니가 병실에서 나와 복도를 거쳐 현관까지 뛰어나가는 게 보였다.
병원을 나오니 가을비가 다시 내리고 있었다. 지적지적 내리는 비를 맞으며 신형사는 근처의 허름한 대포집으로 들어갔다. 소주잔을 단 번에 목으로 털어 넣자 순간 거친 기침이 터져 나왔다. 신형사의 몸은 적지 않게 축나 있었다. 허리춤에서 무선 호출기의 진동이 일었지만 신형사는 확인도 안 한 채 전원을 꺼버렸다. 술 잔 앞에서 고개를 숙인 채 담배를 피우던 신형사의 발밑으로 갑자기 빗물을 머금은 노란색 우산 하나가 다가섰다. 신형사는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옆에 앉아도 될까요?
검은 레인코트를 입은 처음 보는 여자였다. 그렇게 세련되고 아름다운 젊은 여성은 처음이었다. 그녀에게서 은은한 향수가 풍겼다. 신형사가 담배를 꺼내어 물자 그녀는 같이 피워도 되냐고 먼저 라이터를 켜 주었다. 두 사람이 담배를 거의 다 태울 무렵,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서 고개를 숙였다. 테이블에 전화번호가 적힌 메모지가 놓여 있었다. 신형사는 소주병을 들어 잔을 채웠다. 그의 손이 가녀리게 떨고 있었다.
* * *
며칠 후 영민은 아버지가 입원해 있는 건대 앞 민중병원 근처의 한 카페에 도착했다. 눈이 붉게 충혈 되고 어깨는 축 처져 있었다. 잠시 후 카운터에서 전화벨이 울렸다.
레드애플 건대입구점입니다.
종업원이 1253 호출하신 분을 찾았다. 영민은 카운터로 다가갔다. 수화기를 건네받고 첫마디를 내뱉으려는 순간이었다.
김영민!
등 뒤에서 한 사내의 굵직한 목소리가 들렸다. 영민은 반사적으로 수화기를 내던지며 오른쪽 출입문을 향해 뛰었지만 누군가 발목을 걷어차는 바람에 중심을 잃고 바닥에 나뒹굴고 말았다. 번개처럼 영민을 제압하며 양손을 뒤로 꺾어 철커덕 수갑을 채운 자는 신형사였다. 영민은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았다.
영민을 태운 기동대 차량이 경찰서에 도착하자 기자들이 몰려들었다. 수갑을 찬 영민을 데리고 현관으로 들어서는 신형사에게 한 기자가 물었다.
시민의 제보로 검거할 수 있었다는 데 사실입니까?
신형사는 입을 꾹 다문 채 영민의 팔꿈치를 밀며 안으로 들어갔다. 영민은 곧바로 유치장에 감치되었다. 신형사가 형사계 사무실로 들어서자 제일 먼저 반장이 다가와 활짝 웃으며 박수를 쳤다.
기가 막힌 타이밍이야!
다른 형사들도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나 갈채를 보냈다. 신형사는 겸연쩍은 표정으로 평소처럼 자리에 앉아 검거보고서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반쯤은 작성되어 있던 문서를 완성해 신형사는 반장의 자리로 갔다.
우리 신형사 이제 일 계급 특진이야! 음, 좋아, 집요한 추적 끝에 밝혀 낸 통신 아지트 레드애플, 계속된 잠복 중에 검거 당일 결정적인 시민의 제보, 좋아, 제보 후 5분 안에 아지트로 출동해 검거까지. 이 정도면 충분해. 신형사 정말 수고했어!
김영민이 검찰로 송치되는 날 신형사는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그때 그 이동은입니다. 감사하게도 세금 한 푼 떼지 않은 현금 천만 원이 방금 제 계좌로 입금됐습니다.
신형사는 비가 오던 그 날 대포집에서 만났던 노란우산을 떠올렸다.
오히려 제가 감사드려야죠. 결정적인 제보에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신형사의 수화기 너머에서 먼저 전화를 끊은 그녀는 공중전화 부스를 나와 민중병원으로 들어갔다. 그녀의 손에는 두툼한 현금봉투가 들려 있었고 접수 창구의 한 직원은 한 참을 세어 보았다.
어느새 그날의 어둠이 짙어 가고 있었다. 대기는 우울했고 신형사의 입안은 바싹 말라 있었다. 경찰서를 나온 그는 오랜만에 단골집으로 걸어 갔다. 이제 막 퇴근한 직장인들이 술과 안주를 시켜 놓고 오붓한 저녁을 보내고 있었다. 신형사는 새삼 평소와는 다른 분위기를 느꼈다. 과거에 비해 선술집 분위기도 시대의 경직성을 벗어가고 있는 걸까. 직장인들도 이젠 제법 거리낌 없이 정부와 사용자를 향해 비판의 목소리를 내는 데 주저함이 없었다.
독재자 전두환과 현직 대통령 노태우를 술안주 삼아 전대가리라는 둥 노가리라는 둥 농을 주고 받으며 술 잔을 주고 받는 모습이었다. 신형사는 단골집의 공기가 예전 같지 않다고 느끼면서도 연신 담배 연기를 피워 올렸다. 그리고 생각했다.
세상사는 오래도록 쫓는 자와 쫓기는 자의 팽팽한 싸움이었다. 쫓는 자를 좇는 자와 쫓기는 자를 좇는 자들의 지속적인 대립 속에서 나는 무엇이었는가라고 신형사는 속으로 곱씹었다. 그리고 소주 한 잔을 가득 채워 들이키면서 신형사는 이렇게 독백했다.
저 사람들 사이에서 나는 무엇일까. 아니 어떤 존재로 살아갈 수 있을까.
신형사는 붉게 달아오른 자신의 볼을 매만지며 술자리마다 벌겋게 상기된 얼굴들의 온도를 어떻게 가늠할 수 있을까를 묻고 또 물었다. 자신에게.
나는 한낱 쌀겨 만큼이라도 제 몫은 하고 있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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