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눈빛 여행
1.
영양실조 걸린 새끼늑대처럼 보일러는 맥없이 울어대기 시작했다
눈빛(眼光)은 드디어 때가 왔음을 직감했다
생애 처음 안구(眼球)로부터의 탈출을 결심하고 기회를 엿보던 터였다.
아침부터 내린 폭설로 녀석은 온종일 방안에 처박힌 채
노트북 모니터를 뚫듯 자신의 눈깔을 혹사시키고 있었다
눈빛은 최근 1년 간 녀석의 행동이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국정원 심리전단 소속 국내파트 제1팀 3셀 세포원 김알바.
녀석은 잠자리를 털기 무섭게 컴퓨터를 켜고
애국과 종북타파를 부르짖는 댓글을 SNS마다 주렁주렁 매달았다
24시간 내내 거실에서 -- 입을 쩍 -- 벌리고 있는 TV수상기에서
댓글의 소재가 될 만한 정보들이 연일 뛰쳐나오고 있었다
종편 채널들은 북한관영방송처럼 새빨갛게 쓰고 시퍼렇게 뱉고 샛노랗게 퍼트렸다
오늘은 김정은의 권력욕과 장성택의 편력을 보도했고
2014년 1월에서 3월 사이에는 북한의 침투가 예상된다는 정보를
종교까지 끌어들인 철도노조와 야권이 아니라 국정원이 발표했다면서
대선불복 세력을 호되게 나무라는 여당의 메시지를 배본했다
녀석은 늘 세균성결막염에 시달리면서도 정작
만성안질로 앓아누울 지경에 빠진 자신의 안구는 추호도 걱정해 주지 않았다
항상 충혈을 앓아오던 안구 역시
알바 녀석의 눈구멍에서 단 한 번이라도 뛰쳐나올 생각은 꿈에도 하지 못했다
자기도 서서히 청춘을 잃어갈지 모른다고 생각한 눈빛은
결국 알바 녀석을 버리고 안구를 탈출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이제 막 노트북을 덮고 알바 녀석이 침대에 누워 불을 껐다
어둠 속에서 씀벅거리던 눈꺼풀이 완전히 닫히기 직전
눈빛은 안구를 슬며시 빠져나와 아무도 안 보는 사이 집을 나섰다
2.
수억만 개의 벚꽃 잎들이 어둠을 핥으며 떨어지고 있었다
가로등은 누런 혓바닥을 내밀어 떨어지는 꽃눈개비들을 잡아먹고 있었다
차문을 걸어 잠근 택시들은 취객이 뱉은 가래침을 훈장처럼 달고 서행했고
마지막 버스에서 쏟아진 귀객들은 삽살개처럼 골목으로 흩어졌다
황달 걸린 눈깔을 부라리며 질주하는 음주 차량의 경적 속으로
불나비처럼 휘청거리며 달려드는 눈발들 속에서
무릎이 시린 중년들은 어디로 가야할지 망설이고 있었다
바람은 어디로 갔을까
눈빛은 바람이 보고 싶어졌다
바람은 분명 사람들이 많은 곳을 휘젓고 다닐 테지
바람은 사교성이 좋으니까 외롭지도 않겠지
블랙 스타킹을 신은 여인의 하이힐이 택시 뒷좌석으로 빨려 들어가는 순간
눈빛은 그녀의 발목에 휘감긴 채 동승에 성공했다
택시가 홍대 정문 앞 놀이터 횡단보도에 서고
뒷좌석 문으로 그녀의 오른쪽 다리가 미끄러져 내려올 때
눈빛은 드디어 바람의 실체를 느끼기 시작했다
바람은 오체투지 순례자처럼 낮은 자세로 길바닥을 쓸다가도
종료 휘슬 직전의 아이스하키 선수처럼
행인의 무릎과 무릎 사이를 쾌속 질주하며
앞서 간 자들의 흔적을 지우고
흔적을 남겨가는 자들의 흔적을 앞서갔다
붉은 눈물이 떨어지고 파란 미련들이 뿌려지는 생의 한복판
바람은 젖어가는 눈발들을 일으켜 세워 골목으로 숨어들었다가
번개처럼 골목을 뛰쳐나와 서커스 곡예단처럼 고공 줄타기를 펼치며
전깃줄에 함초롬히 조잘대던 눈발들 락일락 꽃잎처럼 털어 버리고,
초라한 선술집 슬레이트 지붕 위에 누워 달빛에 몸 그을리며 은폐 중이던
눈발들을 깨우려고 가만히 다가서는가 싶더니
영역을 침범당해 놀란 도둑고양이가 휘두른 발톱에 옆구리를 찢긴 채
기겁하며 쏜살같이 달아나다가 앳된 플랭카드에 머리를 풀럭 쳐 박고는
광목 펄럭이는 신음 소리를 내다 시름시름 흩어졌다
그녀는 아직도 목적지를 상실해 방황하는 꽃가루처럼 헤매었다
눈빛은 바람을 보았으나 자신이 본 것이 바람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바람은 그저 자유자재로 모든 사물에 빙의되었다가도
자기를 빙의한 타인으로 뜨겁게 되돌아오길 반복했다
그녀의 짧은 스커트 속으로 파고들어 찢어진 북소리로 들리다가도
여행 온 한 중년의 파리지앵 가슴에 얼굴을 파묻는 여인이 되기도 하거나
가로등 불빛 아래 노래하는 맹인 부부의 그림자로 풀어졌다가도
빌딩 담벼락에 들러붙어 지상의 밤을 염탐하는 잿빛 하늘이기도 했다
3.
바람에게 말을 걸자 눈이 시려왔다
시린 눈을 비비고 싶었으나 바람의 빛깔을 보고 싶어 꾹 참았다
정형의 사물들이 일제히 녹아내리고 있었다
바람의 색은 무광이었다가도 유광이었고
빛 가운데 존재했다가도 어둠 가운데서 풀어졌다
바람은 무색과 유색의 경계를 넘나들며 빛을 요리했다
누구나 바람에게 말을 걸 수는 있으나
바람의 대답을 들을 수 있는 자는 거의 없었다
바람은 몸으로 말하고 소리로 답하며
마음으로 듣고 침묵으로 행했다
바람이 처음 태어난 곳을 바람에게 묻는 것도 예의는 아니다
모체를 알 수 없어 평생을 떠돌아 다녀야 할 운명에게
뜨거운 수프를 건네고 푹신한 소파를 권하는 것조차
결코 호의가 될 수는 없다는 것을 눈빛은 깨닫는다
바람은 자유의 빛깔
그러나 모든 피의 절규에 갇힌 고뇌의 흔적
인생이 그대의 아픔을 긍휼히 여겨주기 시작할 때부터
운명이 그대의 가슴을 뜨겁게 안아주기 훨씬 오래전부터
바람은 안갯속에서 숨죽여 가며 자신의 날개를 찢어왔다
화가들이 새의 날개를 그리며 바람을 묘사하고
가인들이 파도를 노래하며 바람을 연주하고
시인들이 탄식의 언어로 바람을 받아쓰기할 때마다
오체투지의 여정 끝에 선 순례자들은 바람이 되었다
생사의 경계를 넘나드는 호흡이 되었다
빛이 되었다
4.
눈빛은 생애 처음 바람이 되고 싶은 욕망을 가졌다
그녀는 여전히 해독불가의 암호를 쏟아내는 핸드폰을 쥐고 있었다
상실의 언어들은 화성을 무시한 음표처럼 잡스럽게 흘렀다
수화기 너머로 영양실조 걸린 늑대새끼가 울고 있었고
간간이 한 사내의 절규가 파편처럼 터져 나왔다
개새끼 자는 것 좀 깨웠다고 거짓말을 쳐?
눈깔 멀쩡히 뜨고 앞이 안 보인다니 갑자기 미쳤군!
화가 난 그녀가 통화음을 끊으며 모퉁이 선술집으로 향했다
탁자 밑 발목부츠 앞에 수호견처럼 조용히 앉아 있던 눈빛은
그녀의 무릎이 맥없이 풀어지는 것을 보았다
그녀가 빈 잔을 탁자에 내려놓을 때마다
탁자 밑에 눈처럼 외로움이 쌓여갔다
그녀가 취해가는 게 못내 안타까웠던 눈빛은
의자로 펄쩍 뛰어올라앉아 그녀의 술잔에 성긴 눈빛을 보았다
그녀의 눈빛이 한 남자의 등짝에 꽂혀 활처럼 휘었다가 튕겨져 나갔다
대각에서 다른 사내의 눈빛이 그녀를 향해 질주해 왔으나
이내 잘게 부서져 술잔으로 떨어졌다
술집의 탁자들 밑에서는 외로움의 비늘이 수북이 쌓여갔다
모든 사람들의 무릎이 풀어져 가던 탁자 밑으로
겨울바람이 발가벗은 채 수호견처럼 앉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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