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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_젊음의 기원_07_인연_87년 12월 16일 오후 5시 30분

형수오빠 2025. 6. 26. 18:59

 

7. 인연_12월 16일 오후 5시 30분

 

시위 진압 현장에 투입된 전투경찰들은 늘 배가 고팠다. 불규칙한 식사 횟수 때문이었다. 물론 시위대와 맞붙어 치열한 전투를 벌이는 시간만 피한다면 어김없이 삼시 세 끼를 챙겨 먹을 수는 있었다. 하지만 그런 날들도 시위 현장에서 먹는 짬밥은 맛이 없고 소화도 잘 되지 않았다. 전경들은 사시사철 길바닥에서 밥을 먹어야 했고 길을 지나는 시민들의 따가운 시선을 감내해야 했다. 바깥의 기온 변화와 불현듯 닥쳐오는 궂은 날씨에도 정권의 안위만을 보위하기 위해 차출된 이 나라의 청년들은 들짐승처럼 묵묵하게 주어진 현실을 버텨가야 하는 처지였다. 군기반장 철만이 속한 백골단 역시 전투경찰들과 다르지 않았다. 일반인 신분의 용병 아저씨들을 뺀 모든 현역 복무자들은 전경이든 백골단이든 동일한 규칙을 따라야 했다.    

진압부대의 저녁 식사 시간에 맞추어 밥차가 도착했다. 현역들이 저녁을 먹는 시간이 다가오자 백골 용병 아저씨들은 하나 둘씩 수송 버스를 빠져나갔다. 그들이 인근 식당을 찾아 골목들 사이로 사라지는 것을 확인한 군기반장 철만은 배식통을 받아 온 당번들에게 배식을 명했다. 배식당번들은 일제히 '배식~개시!'를 외치며 주차된 수송버스의 우측 인도에 나란히 놓인 배식통 뚜껑을 열어젖혔다. 순간 인도를 걸어가던 아줌마 아저씨들이 그 광경을 보았고 눈이 휘둥그레지며 잠시 걸음을 멈칫거렸다. 허연 김이 모락모락 피어 오르는 꽁보리 위주의 쌀밥, 누렇게 울어 난 미적지근한 콩나물국, 고춧가루가 듬성듬성 뭍은 배추김치, 형체 모를 일그러진 계란찜, 밀가루 잔뜩 섞인 무늬만 소시지와 간장에 볶아 조린 시장 덴뿌라였다.

먼저 배식을 받은 고참들은 수송버스 안으로 기어 들어갔고 그 밑의 군번 낮은 후임들은 식판을 들고 인도 바닥에 주저 않았다. 인도를 걷는 사람들의 허리 아래를 쳐다보거나 길을 지나가는 동네 개들과 시선을 마주치며 밥을 다 먹는 시간은 채 10분이 안 되었다. 철만은 후임들이 모두 배식을 받을 때까지 버스 앞 문에 걸터앉아 지켜보았다. 배식이 끝나자 이번에는 철만이 배식당번들에게 손수 배식을 해 주었다. 철만은 당번들의 식판에 남은 음식을 듬뿍 듬북 담아주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자신의 식판에 음식을 담았다. 철만이 밥을 먹는 시간은 후임들에 비하면 엄청 긴 시간이었다.

'나는 밥을 천천히 먹는다. 너희들은 충분히 쉬어라.' 

철만이 밥을 먹는 시간 동안 후임들은 군번에 따라 두 명이 한 조로 인근 상가나 건물의 화장실을 이용했고 시민들의 눈을 피해 수송버스와 버스 사이의 공간에 쪼그리고 앉아 담배를 피웠다. 식사를 한 후 30분 정도 쉬는 시간이 주어지는 동안 철만은 일부러 아주 천천히 밥을 먹었다. 그 시간 만큼은 후임들이 지근거리에서 자유롭게 쉴 수 있었다. 가끔은 운이 좋아 수송버스가 주차된 인돗가에 슈퍼마켓이 있고 공중전화까지 있는 경우 현역들은 군것질 거리를 사 먹거나 어디론가 전화도 걸 수도 있었는데, 때마침 운이 아주 좋은 날이었다.  

“아니 과장님 아닙니까!”

기자회견장에서 한바탕 한 민사독 기자와 신수미 기자가 경찰 진압부대의 진지를 찾았다. 인사를 하는 신기자에게 관악서의 경비과장은 반갑게 웃는가 싶더니 그 뒤에 서 있는 민기자를 보고는 화들짝 놀라는 표정이었다.

“아니, 민기자! 여기까지 웬일이야?”

넙죽 웃는 신기자 옆에서 담배에 불을 붙이던 민기자가 씁쓸한 표정으로 연기를 내뿜으며 말했다.

“에잇, 형님은 아직도 현장에서 뭐하슈?”

“팔칠 년이 미친년이지. 과장 말년에 이게 뭐냐. 근데 저 안에는 들어갔다 오는 거지?”

“요기나 좀 하고 다시 들어가야죠.”

"그래? 안 그래도 지금 막 먹으려던 참인데, 잘됐네!" 

"에잇 형님두! 요즘 누가 현장에서 정복이랑 밥을 먹어요. 사복이면 모를까."

현장 지휘에 관록이 붙은 경비과장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는 재빨리 지프차에서 검은색 롱패딩을 꺼내어 입었다. 영락없는 동네 아저씨였다. 그는 먼저 신기자의 카메라 가방을 뺏어 어깨에 맨 채 골목 안 순댓국집으로 먼저 걸어갔다. 신기자가 마지못한 잰걸음으로 그의 뒤를 따르는 순간, 얼추 담배 한 대를 다 피운 민사독 기자의 눈에 뭔가 걸려들었다.

민기자는 손가락을 튕겨 담배꽁초를 지프차 밑으로 날려 버리고 넋이 나간 표정으로 수송버스들이 줄줄이 주차되어 있는 쪽을 향해 조심스럽게 발을 떼었다. 버스 세 대 정도를 지났을 무렵 그는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미간을 찌푸린 채 누군가를 유심히 바라보려는 순간이었다.  

"민형! 모해! 과장님 기다리는데!"

잠시 뒤를 돌아본 민기자는 신기자를 향해 손짓을 해 주고 나서 다시 몸을 돌렸다. 근데 뭔가 순식 간에 사라진 것이었다. 신기자는 한 번 더 보채는 소릴 해왔다. 민기자는 그제야 몸을 돌려 신기자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두 사람이 순댓국집으로 들어가자 경비과장은 번쩍 손을 들어 반겼다. 대여섯 테이블이 모두 베이지색 파커를 입은 백골 용병들로 꽉 차 있었다. 그들은 순댓국을 먹으며 막걸리나 소주를 곁들였다. 자리에 앉자마자 젊은 여주인이 주물럭과 소주를 가져왔다. 경비과장은 손수 집게를 들어 달구어진 팬에 주물럭을 얹고는 두 사람에게 소주를 따라주며 물었다.  

“안에 상황이 좀 어때? 어째 오래갈 분위기지?!”

신기자는 민기자의 눈치를 보며 고개만 끄덕였다. 센 불에 양념이 밴 얇은 불백이 펼쳐지자 팬에서는 소낙비 쏟아지는 소리가 났다. 민기자는 고기가 익어 가는 사이 말이 없었고 경비과장은 고기를 뒤집어 가며 신기자에게 기자회견 내용을 듣는 중이었다.   

“신기자 잠시 얘기 좀 해 드리고 있어.”

민기자는 탁자 위에 올려 둔 담배와 라이터를 들고 밖으로 나갔다. 그는 골목을 빠져나가 아까 그 수송버스가 주차된 곳을 향해 걸어갔다.

신기자는 경비과장에게 부재자 투표함이 빵 배달 차량에 실려 밀반입되는 게 발각되었고 선관위 사무실에서는 부정투표 조작이 의심되는 증거물들이 감시단원과 시민들에 의해 확인되었다고 얘기해 주었다. 경비과장의 낯빛이 약간 일그러지는가 싶더니 신기자가 구청 건물 안에 선관위원들이 잡혀 있다고 얘기하자 그 자리에서 무전으로 그 사실을 어디론가 알렸다.

민사독 기자가 식당으로 돌아온 것은 약 10분쯤 후였다. 그의 옆에는 백골단원 한 명이 서 있었다.

“과장님 제 사촌 동생입니다. 철만이!”

철만은 앞에 앉은 경비과장을 보자 바짝 긴장한 낯빛이었다. 경비과장의 눈동자가 민기자와 철만을 번갈아 오가더니 순간 너털웃음으로 터졌다. 

"뭐야! 하나도 안 닮았잖아!"

경비과장은 철만에게 돼지불백상추쌈을 크게 하나 싸서 주었고 소주도 컵에 슬쩍 따라 주었다. 민기자는 주먹 만한 쌈을 입에 넣고 꾸역꾸역 씹어 삼키는 철만을 지긋이 바라보았다. 얼마나 맛이 있던지 철만은 순간 혀를 깨물다 말았고 눈이 살며시 붉어졌다. 후임들에게는 군기반장으로 통하며 염라대왕 같던 철만의 색다른 모습을 발견한 듯 다른 테이블에 있던 백골 용병 아저씨들은 자기들끼리 히죽거렸다. 경비과장은 계속 쌈을 싸서 철만이 손에 쥐어 주었고 민기자는 계속 그가 먹는 모습을 지긋이 바라보았으며 주변의 용병 아저씨들은 계속 해죽거리거나 자리를 떴고 이 모든 파노라마를 관람하던 신수미 기자는 철만에게 불쑥 호기심이 치밀어 올랐다. 

신기자는 철만의 서글서글한 눈매와 큰 키 그리고 다부진 몸매를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민기자를 바라보면서 너와는 전혀 안 닮았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근데, 정말 사촌 맞아요?"

철만은 수줍은 듯 말을 잇지 못하고 민기자의 표정을 살피는 데 민기자는 탁자 밑으로 철만의 워커를 툭툭 치면서 입으로는 쓸데없는 소리를 한다며 신기자의 말을 막았다. 신기자는 체념한 듯 경비과장에서 하던 얘기를 계속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러자 민기자는 철만에게 잔을 권하며 조곤조곤 말을 걸었다. 

“잘 있니?”

“그럼요. 전 보시다시피.”

“말고, 누나!”

“아! 연락 안 된 지 꽤 됐죠.”

“잘 있겠지. 너무 걱정은 말아.”

민사독 기자는 철만의 어깨에 손을 얹고 쓰다듬어 주었다. 그건 일종의 위로이자 공감이었다. 민기자는 직접 상추쌈을 큼지막하게 싸서 손에 들고는 컵에 있는 소주잔을 들어 철만에게 건배했다. 

“먼저 한잔 해.”

손에 든 쌈이 건네지는 걸 본 신기자는 갑자기 경비과장과 하던 얘기를 멈추고 야릇한 표정으로 농담을 던졌다.

“과장님, 이거 무슨 상황이죠? 둘이 무슨 사이라도 되나?”

철만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소주를 벌컥 들이 킨 후 민기자의 손에 들린 상추쌈을 한 입에 받아 우걱우걱 씹어 넘겼다. 민기자는 시계를 보았다. 그리고 철만의 엉덩이를 툭 치면서 항상 몸조심하라고 인사를 건넸다. 자리에서 일어난 철만은 경비과장에게 경례를 부치고 신기자에게 목례를 한 다음 식당을 나섰다. 그가 나가자 신기자는 민기자에게 진짜 사촌동생 사이인지 빈정거리듯 왜 성이 다르냐고 따져 물었다. 그녀가 물을 때마다 민기자는 아님 어쩔 건데 하면서 말을 잘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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