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_ 젊음의 기원_05_기자회견_87년 12월 16일 오후 2시
5. 구로구청 기자회견_12월 16일 오후 2시
민사독 기자와 신수미 기자는 구로구청 앞마당에 운집한 인파를 헤집고 청사 건물 3층에 있는 선관위원실 앞에 도착했다. 민기자가 문 손잡이를 열고 들어가려 했지만 철문은 안에서 굳게 닫혀 있고 안내문 한장이 달랑 붙어 있을 뿐이었다. 인상을 잔뜩 지뿌린 민기자는 안내문의 글귀를 빠르게 읽어 내려갔다.
‘투표함 반출 관련 내외신 기자회견, 오후 4시’...주최...‘공정선거감시단, 평민당, 민주당, 선관위’
민기자는 혀를 끌끌 차며 문을 발로 세게 찼다. 안에서는 전혀 반응이 없었고 인기척도 나지 않았다. 옆에 있던 신수미 기자가 카메라로 안내문과 닫힌 문을 찍었다. 기회견장은 굳게 닫혔으나 다른 기자들은 벌써부터 복도에 앉아 진을 치고 있었고 민기자는 그런 수동적인 모습이 성에 안 차는 표정으로 문을 다시 발로 차기 시작했다. 그러자 안에서 철문이 조금 열렸고 어떤 사람이 고개를 빼꼼 내밀며 복도 쪽을 한번 훑고는 다시 문을 쾅 닫아 버렸다.
"이봐요! 왜 문을 닫는 건데! 기자회견 준비를 어떻게 하길래? 취재를 봉쇄하면 안 되는 거 몰라? 문 안 열어이 새끼들아!"
신기자는 그 모습을 계속 카메라에 담았고 복도에서 대기하던 다른 기자들도 그제야 자리에서 일어나 문 앞으로 몰려 들었다. 그러자 신기자가 민기자에게 이제 그 정도면 될성 싶다는 듯이 눈짓을 했다. 민기자는 다시 한번 큰 소리로 욕을 하면서 문을 발로 세게 걷어 차고는 뒤를 돌아 기자들 앞에 자신의 모습을 각인시켰다. 몇몇 외신기자들도 민기자가 항의 하는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다.
사건이 발생한 오전 싯점부터 한 둘 씩 몰려와 점심 나절부터 급속도로 불어난 시민들로 구로구청 앞마당은 천여 명의 인파가 집결해 있었다. 1톤 트럭의 짐칸에 놓인 부재자 투표함 상자 위에 서로 등을 맞대고 역팔짱을 낀 채로 앉아 있는 두 명의 청년을 향해 시민들은 박수와 환호를 보내며 격려했다. 수많은 카메라 기자들이 그 광경을 향해 셔터를 눌렀다.
시민들을 통솔하는 어떤 지도부나 통제원이 없이 사람들은 삼삼오오 군집하여 작심 발언들을 쏟아 내기 시작했다. 평민당원들은 특유의 전라도 사투리를 섞어가며 ‘이런 호로 잡노무 새끼들, 인자 증거도 나왔응 게, 다 죽어 부렀어. 선거는 인자부터 무효다!’라며 피켓을 만들어 흔들며 성토했다. 다른 한쪽에선 통일민주당원들도 ‘임마들 인자 딱 걸려 삔기다. 빼도 박도 몬 하게 이번 기회에 팍 뿌셔 뿝시다!’라고 성토했다. 인파 중 다수를 차지한 청년학생들은 벌써부터 ‘부정선거 규탄!’ 구호를 외치며 대오를 형성하기 시작했다.
민사독 기자가 3층에서 기자회견을 기다리는 사이 신수미 기자는 구청 앞마당으로 내려와 카메라에 역사의 현장을 낱낱이 담아 냈다. 3층 창문으로 내려다보던 민기자는 신기자와 눈과 수신호를 하는 가운데 시민들 사이에서 터져 나오는 자발적인 구호나 성토의 목소리들을 수첩에 기록했다.
그렇게 오후 4시 정각이 되자 내외신 기자회견을 위해 선관위 사무실이 활짝 열렸다. 50평 남짓한 사무실은 사무용 책상을 일렬횡대로 배치해 프레스라인을 만들어 놓았다. 프레스라인 안쪽으로 5명의 회견 당사자가 서 있었다. 기자회견 사회를 본 한 청년은 마이크를 잡고 정중하게 말했다.
“기자회견입니다. 시민 여러분께서는 기자 분들 뒤로 물러나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카메라 기자 분들은 출입구 옆쪽 벽면에 연단과 의자를 세워 놓았으니 활용하시기 바랍니다.”
민사독 기자는 맨 앞쪽에 자리를 잡고 수첩을 꺼내들며 뒤를 돌아보았다. 그는 신기자가 있는 카메라 기자들의 연단을 살폈다. 그의 눈에 방송 카메라는 딱 한 대만 보였다. 그때 출입구 쪽에서 웅성거리던 시민들 가운데 누군가가 앞으로 나서 큰 목소리로 말했다.
“와 공중파 TV 카메라는 딱 한 대 밖에 안 보이노? 거기 어데예?”
“기독교 방송입니다.”
연단에서 방송 카메라를 조작하던 기자가 고개를 내밀며 말했다. 그러자 시민 중 다른 한 명이 말했다.
“MBC, KBS 놈들 죄다 군부독재 졸개들입니다. 뭘 더 기대합니까! 다 같이 기독교 방송에 박수 한번 쳐 줍시다.”
회견장 출입구에서 복도까지 늘어선 시민들의 박수갈채가 이어지는 가운데 “여기, 한 외신기자가 캠코더를 갖고 왔습니다.” 하면서 “외신기자에게도 박수를 보냅시다!”라고 하자 시민들은 다시 한 번 뜨겁게 반응했다. 잠시 후 숙연한 분위기로 기자회견은 시작되었다.
“그럼, 지금부터 내외신 기자회견을 시작하겠습니다. 먼저 원활한 회견을 위해 공정선거감시단에서 상황보고를 해 주시겠습니다.”
한 감시단원이 오늘 있었던 상황을 시간 순으로 정리해 발표했다. 그 사이 다른 감시단원들이 기자들에게 상황일지가 적힌 보도 자료를 나눠주었다. 상황보고가 끝나자 평화민주당과 통일민주당의 당 관계자들이 각각 마이크를 잡고 부정선거의 심각성에 대해 당을 대변하는 입장을 토로했다. 사회자는 중간중간에 터져 나오는 기자들의 거수 질문 공세가 잦아지자 잠시 마이크를 잡고 “마지막으로 선관위원장의 입장 표명”을 듣고 나서 질문 시간을 갖겠다고 하였고 마이크는 이내 구로을구 선거관리위원장에게 넘겨졌다. 장내는 순식간에 카메라 셔터와 플래시 터지는 소리로 시끄러웠다가, 이윽고 등장한 선관위원장이 마이크를 들자 쥐 죽은 듯이 조용해졌다.
“심히 송구한 마음 가눌 수 없습니다. 저희 구로을구 투표소에서 이런 일이 발생한 점에 대하여, 저는 선거관리위원장으로서 부재자투표함 반출을 진행한 선관위원 및 관계자를 통해 그 사실과 진위 여부를 철저히 보고 받은 바, 금일 오전 11시경 선관위 사무실에서 용달차로 옮기려던 부재자투표함 1점은 구로을구를 주민등록지로 하여 현재 군복무 중인 부재자들의 투표함을 선관위가 보관하고 있던 것으로서, 투표종료 후 일반투표함과 동시에 개표소로 이동하는 번거로움을 피하기 위해, 저희 선관위 직원이 사전에 미리 개표소로 옮겨 놓고자 하여 벌어진 일인 점임을 사실 확인하였습니다. 이에, 본 선관위원장은 이 투표함이 부정투표의 증거가 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본 투표소에서는 어떠한 부정선거도 없었음을 국민 여러분께 명백히 밝혀 드리는 바입니다. 이상입니다.”
기자들의 후미에 서 있던 시민들이 야유 섞인 비난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사회자는 “이제 질문을 받겠습니다!”라고 했고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기자들은 서로 손을 들었다. 민사독 기자는 맨 앞줄에서 번쩍 손을 들고 일어나 사회자에게 다가가 마이크를 달라는 시늉을 하며 손을 내밀었다. 마이크를 거의 빼앗듯 건네받은 민기자는 짧게 자신을 소개한 후 선관위원장에게 질문했다.
“부재자 투표함은 투표가 마감되는 저녁 6시 이후에 옮기는 게 원칙 아닙니까? 근데 그걸 왜 투표 중인 시간에 개표소로 옮기려고 한 거죠?”
“그건 아까 말씀드렸듯이, 업무 편의상 미리 옮겨 놓으려 했던 것입니다.”
민사독 기자는 사회자의 만류에도 마이크를 놓지 않고 계속 질문을 했다.
“업무 편의 상 그랬다면, 이송 중에 호송경찰은 따라 붙었습니까? 어디 소속 누가 인도했나요?”
당황한 선관위원장은 직원쪽을 바라보다가 어물쩡거리며 말을 이었다.
“아 …… 그건, 호송경찰은 없었던 걸로 알고 있습니다.”
장내는 다시 크게 웅성거렸다.
민기자는 이번에는 사회자를 밀쳐가며 마이크를 놓지 않고 계속 질문을 이어갔다.
“호송경찰도 없고, 거기다 투표함을 종이박스에 담은 채로, 그것도 현수막이랑 빵 봉지 등으로 가리고 옮기는 게 정상적인 호송 절차입니까?”
“저는 그렇게 지시한 바 없습니다. 그런 정황적 사실관계 만으로 부정선거라고 단정할 순 없다고 보입니다.”
“아니 선관위원장의 경우 보통 투표소 관할지방법원의 부장판사들이 맡는 걸로 알고 있는데, 그럼 법률가로서 지금 이 상황이 선거법 절차에 맞는 건지만이라도 좀 말씀해 주세요.”
“저는 공무에 충실할 뿐입니다.”
답변이 제대로 나오지 않는다는 듯 다른 기자들이 사회자에게 손을 들어 마이크를 원했다.
사회자가 민기자에게 마이크를 돌려달라고 팔을 뻗자 민기자는 기자들에게 미안하다는 손짓을 하며 다시 마이크를 입가로 가져갔다.
“그럼 딱 마지막 질문 하나만 더 하겠습니다. 반출 책임자 여기 계시죠? 누굽니까?”
민기자가 슬슬 화가 나는 기색을 애써 감추면서 묻자 선관위원장 뒤에 있던 한 남성이 그의 옆으로 나섰다.
“본인도 이 선거를 부정선거로 보진 않으시죠?”
“네. 그렇습니다.”
“그럼 왜 투표함 위에 빵이랑 현수막 등을 올려놓은 거죠?”
“그거야......! 그럼 투표함 밑에다가 빵이랑 현수막을 놓습니까?”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기자들은 성난 셰퍼드 떼처럼 공격적으로 발언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마이크는 안중에도 없이 기자들의 질문은 서로 시끄럽게 섞여 정확히 분간할 수 없었다. 시민들도 가세해 책상 위로 종이 뭉치들이 날아들었다. 민사독 기자는 마이크를 든 채로 단숨에 발을 굴러 책상 위로 올라섰다. 그리고 기자들과 시민들을 향해 말했다.
“이게 기자회견입니까! 반출책임자의 이 무책임한 답변을, 듣고만 있어야 합니까? 딱 한 가지만 더 묻습니다. 여기 상황일지를 보면 오늘 1시 30분경 감시단원들이 이곳 선관위 사무실에서 발견한 투표함 1개, 투표용지 1506장, 붓두껍 60개, 인주 70개, 인주가 마르지 않은 손장갑 6켤레는 뭐죠?”
“맞아요. 밖에 있는 용달차 박스 안에서도 투표용지랑 인주 뭍은 장갑들이 발견됐습니다.”
감시단원 중 한 명이 말을 거들었다. 민기자는 책상을 내려와 몸을 돌려 선관위원장을 향해 말했다.
“선관위원장으로서 해명 해보세요. 왜 투표 도구들이 발견된 거죠?”
고개를 숙이고 있던 선관위원장이 느슨해진 안경테를 올려 쓰며 마이크를 들었다. 회견장의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그의 입술로 향했다.
“그건 지난 10월 27일 있었던 개헌안 국민투표 때 사용하고 남은 것입니다. 투표용지만 빼고요.”
그는 1987년 10월 27일에 있었던 제8차 헌법개정안 국민투표를 말하고 있었다. 그날은 87년 6월 항쟁으로 대통령직선제 개헌을 약속한 민주정의당 총재 노태우가 여야 간의 8자 회담을 통해 헌법 개정을 논의하고, 그 해 9월 18일 여야가 공동으로 국회에서 발의한 헌법개정안을 국민투표에 붙였던 날이었다. 2천5백6십만 유권자 가운데 투표율이 78.2%나 되었고, 그중 찬성이 94.5%로 아주 높았다.
“투표용지만 빼고란 게 말이 됩니까?”
기자들은 마이크 없이 서로 같은 질문을 몇 번씩 반복했다.
“지난 10월 국민투표 때 쓰던 투표 도구들이 이번 12월 대선 투표용지랑 같이 있었던 거네요? 목적이 뭡니까?”
선관위원장은 기자들이 있는 곳을 처다 보지 않았다. 질문이 이어지자 시선을 아래로 떨어뜨린 채 힘겹게 입을 열었다.
“저는 절대로 부정선거나 투표함 밀반출을 지시한 바가 없습니다. 저는 모르는 일입니다. 이상으로 마치겠습니다.”
그가 마이크를 끄고 사회자에게 건네자 기자들은 바닥에서 일어나 프레스라인용 책상 앞으로 다가왔다. 순식간에 회견장은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선관위원장과 반출책임자는 꼼짝할 수 없이 기자들에게 둘러싸였다. 감시단원들과 야당 관계자들은 서로 약속이나 한 듯이 선관위원장과 반출책임자를 선관위원실로 안으로 끌고 들어갔다. 그들은 그 안에 갇혀 버렸다.